우리말 산책
노인봉의 우리말 산책(8) - '않다'와 '안'
뜰에봄
2007. 9. 12. 15:11
(오늘은 급한 불을 하나 끄고 갈까 합니다. 일전에 바라바바님이 던진 문제를 보고 불태산님이 선문답 같다고 하며
국어 선생을 호출하는 바람에 제가 나서겠다고 약속을 한 바 있습니다. 그 후 아이나라님이 잘 해결해 주셨는데
다만 ‘학교에 안 가는 날’의 ‘가는’을 동사인데 형용사로 했다든가 ‘않는다/않고/않으니’의 ‘-는다/-고/-으니’를
어미인데 조사라 한 것 등 잘못 설명된 부분이 좀 있기도 하고 또 좀 덧보탤 이야기도 있고 해서
‘안’을 쓸 자리에 ‘않’을 잘못 쓰지 않는 길을 제 나름대로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말은 특이하게도 무엇을 부정(否定)하는 방식이 두 가지로 나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긍정문을
부정문으로 바꾸는 방식이 두 가지라는 거죠.
(1) ㄱ. 비는 안 오겠어요.
ㄴ. 비는 오지 않겠어요.
앞의 예문에서 보듯이 ‘오다’를 부정할 때 ‘안 온다’에서처럼 부정하는 말을 앞에 놓고 하는 방식이 있고,
그와는 달리 ‘오지 않는다’에서처럼 부정하는 말을 ‘오다’의 뒤쪽에 놓는 방식이 하나 있습니다. 다음 예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2) ㄱ. 안 춥니?
ㄴ. 춥지 않니?
가끔(아니 의외로 흔히) ‘안’을 쓸 자리에 ‘않’을 쓰는 경우를 봅니다. 물론 잘못 쓰는 것이죠. ‘안 춥니’나
‘안 오겠어요’처럼 앞쪽에서 부정하는 때는 ‘않’을 써서는 <안 되겠어요>. (<않 되겠어요>라고 하면 틀립니다!)
‘ㅎ’이 들어갈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ㅎ’은 원래 약해서 잘 안 들리는 소리입니다. 프랑스어의 h가 빅토르 위고(Victor M. Hugo)에서 보듯
아예 묵음(黙音)이 되어 버려 스펠링으로는 남아 있어도 ‘ㅎ’ 소리로 읽히는 일이 없는 것도 그 때문이지요.
우리말에서도 이 ‘ㅎ’이 잘 안 들릴 때가 많습니다.
‘넣어서/ 좋으니/ 많으면/ 뚫어라/잃었다’ 같은 것을 발음해 보세요. ‘ㅎ’이 다 제대로 안 들립니다. 특히
다음 예문에서는 ‘놓아라’의 ‘ㅎ’이 제 소리를 못 내니 ‘노아라’가 되고 이것이 다시 ‘보아라’가 ‘봐라’가 되듯이
‘놔라’까지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ㄱ. 거기 놓아라.
ㄴ. 거기 놔라.
그럼에도 받침 ‘ㅎ’을 살려 적는 것은 다음과 같은 환경에서 ‘ㅎ’의 존재가 확인되기 때문입니다. 즉 다음 예문에서
‘노코/노치/노터라’나 ‘만타/ 만치/만터라’와 같이 발음되는 것은 ‘ㅎ’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4) ㄱ. 놓고 (노코)
ㄴ. 놓지 (노치)
ㄷ. 놓더라 (노터라)
(5) ㄱ. 많다 (만타)
ㄴ. 많지 (만치)
ㄷ. 많더라 (만터라)
소리가 잘 안 들려도 ‘ㅎ’을 받침으로 쓸 때는 이처첨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여도
우리 맞춤법에서 받침으로 ‘ㅎ’이 쓰일 때까지는 수많은 곡절이 있었습니다. 1930년대 초기에 받침으로
‘ㅎ’을 써서는 안 된다, 써야 한다를 놓고 벌인 논쟁을 보면 얼마나 치열했는지 볼 만하답니다. 우리는
선각자들 덕분에 지금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지요.)
그런데 ‘안 온다/ 안 춥다/ 안 들린다’라고 할 때의 ‘안’은 그럴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이 ‘안’은 기원적으로
‘아니’의 준말이므로 그 점에서도 ‘ㅎ’이 안 들어가 있는 말임을 알 수 있지만(“아니 되옵니다”처럼 옛말 투로
말할 때는 ‘아니’가 살아나지요.) 그것 아니더라도 ‘ㅎ’을 찾아내 줄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반면 ‘않다’는 앞의 ‘놓다’나 ‘많다’와 같은 근거로 ‘ㅎ’이 있어야 하지요. 그런데 그것을 다들 잘 알아서인지
‘오지 않겠어요/ 춥지 않구나’처럼 뒤쪽에서 부정하는 경우 ‘않’을 ‘안’으로 잘못 쓰는 일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사실 다음 예문과 같은 경우에는 ‘놓아라’에서처럼 ‘ㅎ’이 잘 안 들리는데도 말입니다.
(6) ㄱ. 여기는 요즘 계속 날씨가 좋지 않아요.
ㄴ. 오늘은 형편이 좋지 않으니 내일 오세요.
ㄷ. 꿈적도 하지 않는구나.
‘않다’를 ‘아니하다’의 준말이라는 쪽으로 외우는 것은 그리 좋은 방법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않고’는
‘아니하고’로 쉽게 바꾸어 볼 수 있지만 ‘않으니’를 ‘아니하니’의 준말이라고 하면 잘 안 맞아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않아요’도 그렇고 ‘않는다’의 경우도 그렇고 ‘아니해요’ ‘아니한다’를 대입해서는 그 관계를 확인하기
쉽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안/않다’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안’만이겠어요. 그래서 다음 한 가지만 외워 두면
만사형통일 것 같습니다.
<부정하는 말이 앞에 놓일 때는 ‘안’이지 ‘않’이 아니다.>
‘안’은 품사가 부사여서 뒤따르는 말과 띄어 쓰는 점이 ‘않다’와 다른 점이기도 하지요. ‘않다’는 늘 그 뒤에
‘-으니/ -어서/ -고/ -는다/ -았-다/ -겠-다’와 같은 어미(語尾)를 덧붙이고서라야 나타나니까요. 그런데
‘안’도 뒤에 오는 말과 붙여 써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7) ㄱ. 안되는 놈은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
ㄴ. 안되면 조상 탓.
ㄷ. 또 떨어졌다니 너무 안됐어요.
이 ‘안되다’는 뜻이 꽤 다르죠. 복합어로서 새 단어가 된 것이지요. 그래서 ‘못나다’나 ‘수이보다’ 따위를
붙여 쓰는 것과 같은 원리로 이 ‘안되다’는 붙여 쓴답니다.
끝으로 하나 덧붙일 것은 ‘않 춥구나’의 ‘않’과 같은 표기는 말하자면 과잉충성인데 이런 게 더 거북스럽게
느껴진다는 점입니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가르침이 여기에도 적용된다고나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