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산책

우리말 산책(34) -인사장

뜰에봄 2007. 9. 17. 19:11
집안에서 혼사(婚事)나 상사(喪事)와 같은 큰일을 치르고 나면 거기에 왔던 분들 및 따로
축의(祝儀)나 부의(賻儀)를 보내 준 분들에게 인사장을 보내는 것이 한 절차가 되다시피 하였지요.
그래서 일년에 몇 번씩은 이런 저런 인사장을 받게 됩니다.

그 인사장들은 대개 틀이 있습니다. 인쇄소에 마련되어 있는 샘플의 것이겠지요. 그래서 우리가 받게 되는
인사장은 거기가 거기인, ‘틀에 박힌’ 인사장이기 쉽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틀에 박힌’ 인사장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천편일률적인 인사장을 받으면 그야말로
끝까지 읽지도 않게 됩니다. “일일이 찾아뵙고 인사를 올리는 것이 도리오나” 어쩌고저쩌고 하면
자세히 읽을 필요도 없게 되지요. 인사장을 읽는 게 뭐 그리 재미있는 일일까 마는 이런 인사장은
정말 재미가 없고 맥이 풀립니다. 물론 보낸 이가 정성을 덜 들였다는 인상도 어쩔 수 없이 받게 되지요.

저는 특히 ‘일일이’가 마음에 안 듭니다. ‘일일이’는 뭔가 하기 싫은 일을 할 때 쓰는 말 같은 인상을 줍니다.
“이걸 일일이 다 맞추어 보라고?”에서처럼 말입니다. 국어사전에 ‘일일이’가 부정적으로 쓰이는 말이라는
설명은 없습니다만 괜히 그런 인상이 듭니다. 받는 쪽에서 보면 “도시락 반찬이며 신발주머니며 숙제며
일일이 더 챙겨 주셨어요”에서처럼 ‘일일이’는 좋은 뜻을 담고 있는데 하는 쪽으로서는 “언제 그걸
일일이 세고 있겠니?”에서와 같이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일일이’는 그리 좋은 표현 같지는 않습니다. 인사장을 받는 사람은 그 편지가
자기 개인에게 온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게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일이’는 여러 사람을 한 자리에 놓고
마이크로 인사하는 형식 같아 보입니다. 한마디로 정성이 모자라 보입니다.

큰일을 치르고 나 보면 참으로 많은 분들한테 신세를 지게 되고 그게 여간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그
고마움을 어떻게든 좀 진정을 담아 인사를 하고 싶은 심정이 아니 들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남들이
만들어 놓은, 벌써 수천수만 명이 우려먹은 틀에 넣어 보낸다는 것은 성의 부족이 아닐까 싶습니다.
비서를 시켜 자기 이름조차 인쇄된 연하장을 보내는 격이라고나 할까요. 어떻게든 자기만 낼 수 있는
목소리를 담아 보내는 게 최소의 예의가 아닐는지요?

저는 복이 많아서인지 제 마음에 드는 인사장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중 꽤 여러 개를 모아 두고
있기도 합니다. 세상이 판에 박은 듯 재미없게 돌아가고 있을 때 이렇게 개성(個性)이 살아 있고
정성과 따뜻함이 살아 숨쉰다는 게 무척이도 귀히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귀하다’는 ‘드물다’는
뜻이기도 한데 제가 보관하고 있는 인사장이 귀한 것이 아닌 때가 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