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산책

우리말 산책(36) ― '좋이'와 '적이'

뜰에봄 2007. 9. 17. 19:15
아직 컴퓨터가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 책 한 권 내려면 교정지가 몇 번씩이나  왔다 갔다 하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초교가 나왔는데 내가 머리말에서 “좋이 10년은 되었다”고 써 보낸 것이
“족히 10년은 되었다”고 찍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족히’를 ‘좋이’로 고쳐 보냈지요. 그런데
재교지를 받아 보니 다시 ‘족히’로 고쳐져 있었습니다.

‘좋이’란 말을 모르는 게 분명했습니다. 허는 수 없이 이번에는 ‘좋이’를 ‘족히’로 고치지 말라는
주의사항을 따로 써서 보냈습니다. 지금도 그 머리말을 다시 읽을 기회가 있을 때는
이 ‘좋이’가 유난히 눈을 끕니다.

사실 ‘좋이’나 ‘족히’는 그 말이 그 말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뜻이 아주 비슷하지요. 그렇기는 하여도
똑같은 말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디로 보나 똑같은 말이라면 세상에 두 개가
있을 필요가 없겠지요. 뭐가 달라도 다르고, 그래서 이럴 때는 역시 이 말이 더 좋다는
구석이 있기 때문에 두 개든 세 개든 있는 것이겠지요.

‘좋이’는 말할 것도 없이 ‘좋다’에서 파생된 말이지요. ‘깊다’에서 ‘깊이’, ‘많다’에서 ‘많이’가
만들어지듯이 말입니다. ‘좋다’를 ‘�다’라고 하던 옛날에도 ‘됴히’가 쓰였으니 뿌리가
깊은 말이기도 하고요.

좀 다른 이야기지만 논어를 우리말로 번역한 <논어언해(論語諺解)>를 보면
<지자요수(知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의 <樂水>와 <樂山>을 <물을 됴히 녀기고>
<산을 됴히 녀기고>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좋아하다’로 번역하지 않고 ‘좋이 여기다’라고
번역한 것에 저는 특별히 눈길이 가곤 합니다. ‘좋아하다’라고 하면 좀 적극적으로
등산도 해야 하고 물을 찾아도 가야 하지만 ‘좋이 여기다’는 그저 그쪽을 더 좋게만 생각해도 되는데
논어의 ‘요산요수(樂山樂水)’의 경지는 바로 그런 것이 아닌가 싶어서입니다.

어떻든 ‘좋이’는 ‘좋이 여기다’에서처럼 ‘좋게’라는 의미를 가지고 넓게 쓰였던 말이었던 듯합니다.
그러나 ‘좋이’는 이제 그 쓰임이 많이 위축되어 겨우 “좋이 오십 리는 될 걸요” “좋이 한 되는 되겠어요”
“좋이 서른 살은 되어 보이지?” 등 수량을 나타내는 말과 어울려서만 쓰이게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한테서 점점 멀어져 나이 든 사람이 ‘좋이’라고 써 보내면 젊은 교정원이 부지런히
‘족히’라고 고쳐 보내는 세상이 된 것이겠지요. 그러나 ‘좋이’는 ‘좋이’대로 제 몫이 있을 것입니다.

‘좋이’는 ‘족히’에 비해 좀 고풍스럽다고나 할까 시골 인심 같다고나 할까 어딘가 좀 느긋한 느낌이
있는 듯합니다. ‘족히’가 아파트라면 ‘좋이’는 오래된 기와집이라고나 할까요. ‘좋이’가 좀더
오래 사랑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좋이’처럼 수난(?)을 겪는 단어 중에 ‘적이’도 있습니다. ‘적이’도 ‘적다’의 ‘적-’에 ‘-이’를 붙여 만든 말이지요.
그렇다면 ‘많이’가 ‘많게’, ‘깊이’가 ‘깊게’의 뜻을 가지듯이 ‘적이’는 ‘적게’의 뜻을 가져야 하겠는데
그렇지가 않지 않습니까? “적이 놀랐어요”, “적이 안심이 되는구나”라고 하면 오히려 ‘많이’라는
뜻이지 않습니까? 뜻이 변하다가 반대의 뜻까지 변하고 만 것이지요.

사람들이 “적이 안심이 되는구나”의 ‘적이’를 ‘저으기’라고 쓰는 일이 많은 것은 이 까닭일 것입니다.
저도 한동안 그렇게 쓴 적이 있습니다만 ‘적이’가 그 생김새와는 의미가 너무 달라 이 자리에
설마 ‘적이’가 쓰일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국어사전에서 ‘저으기’를 찾으면 <‘적이’의 잘못된 말>이라고 나오지 않습니까? ‘적이’가
아무리 변심을 하였어도 그 출신성분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이참에 말이라는 게 참 재미있게도 변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보아도 좋을 듯합니다. ‘박’으로 만든 것이
‘바가지’인데 플라스틱으로 만들어도 ‘바가지’고, 주변에 바가지라곤 없는데 마나님들은 잘도
‘바가지’를 긁지 않습니까? ‘적이’가 ‘적잖이/많이’라는 정반대의 뜻으로 쓰이게 된 것도
우리에게 재미있는 세상을 구경시켜 주는 착한 짓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그러면
‘적이’를 ‘저으기’로보다 ‘적이’로 적는 게 조그만 예의가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