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산책

우리말 산책(39) ― 쉼표, 그리고

뜰에봄 2007. 9. 17. 19:19
혹시 <먹고, 쏘고, 튄다>라는 책 읽어 보셨는지요? 린 트러스라는 영국의 여류 작가가 쓴 Eats, Shoots & Leaves를
번역한 책인데 2003년 영국에서 출판되자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고 하네요. 오늘날 영국 사람들이 문장부호를,
즉 구두점(句讀點)을 얼마나 엉망으로 찍어 대는가 하는 걸 고발한 책이어서 말하자면 딱딱하기 마련인 문법책인데
그런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게 또 화제가 되었던 모양입니다.

제목부터 재미있지요? 동물원 안내판에서 팬더에 대해 이것저것 설명하면서 원래 전달하고자 한 뜻은
팬더는 “죽순(shoots)과 잎(leaves)을 먹는다(eats)”는 것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eats 다음에 쉼표를 찍는 바람에
그 쉼표가 and의 뜻이 되어 엉뚱하게도 “먹고, 쏘고, 튄다(떠난다)”로 읽히게 된 경우를 바로 제목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 책에는 이런 재미있는(아니, 어처구니없는) 예가 수없이 많고 또 그것을 비판하는 저자의 얘기가 얼마나
우렁차고 현란한지 결코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닌데도 한 번 읽으면 저도 모르게 빠져들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 배우는 것도 많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영문학과 동료들에게 “영어에서 문장 첫머리를 대문자로 쓰는 게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라고 으스댔는데 그 관행이 시작은 13세기에 됐지만 굳어진 것은 16세기라는 것도 여기서
새로 배운 내용의 하나지요.

이 책을 읽으며 특히 흥미를 느꼈던 것은 영국 같은 나라에서 어떻게 이런 책이 나올 정도로 사람들이 그렇게
무식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평소 우리가 알기로는 그들은 콜론, 세미콜론을 비롯하여 아포스트로피,
하이픈 등 우리보다 종류부터도 많지만 그 용법을 세세한 구석까지 규정하여 놓고 그야말로 점 하나 찍는 것도
엄격하게 다스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책을 보면 그들도 우리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어 보입니다.

저자는 그 원인을 부실한 교육에서 찾고 있었습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 오늘날 세상이 다 비슷비슷하게 돌아가는구나,
그래서 거기서도 그럴 수박에 없나보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대개 이런 얘기입니다.

“영국 교육계를 돌아보면 달의 뒷면에 비견될 수 있을 정도로 암흑에 휩싸여 있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교사들은
문법과 철자법이 자아 표현에 방해가 된다는 입장을 떠받들고는 어느 시기보다도 문법에 대해 냉담한 태도를 취하였다.”
“1970년대에는 어떤 교육 전문가들도 머지않아 개인용 컴퓨터, 인터넷,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휴대용 전화기의 보급에 따라
문자를 통한 의사소통 행위가 일반인들 사이에 폭발적으로 증가하리라는 사실을 예견하지 못하였다.”
저자는 이런 표현을 쓰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날 문맹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만한 사람들이 아무데나
무조건 사용하는 문장부호가 있다면 이는 바로 쉼표이다.” 그러니까 교육의 부재(不在)가 멀쩡한 사람들을
문맹(文盲)으로 만들었다는 뜻이겠지요.

이 책을 읽노라면 한편으로는 그게 남의 얘기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하나 그대로 적용되는
얘기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건 역시 남의 얘기구나 싶습니다. 저들은 어떤 것이 틀렸다고 할 때
분명한 근거를 대며 큰소리를 칠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다듬어 온 확고한 규정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육의
부실을 나무랄 때도 왜 그것들을 가르치지 않았느냐고 다그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도 문장부호에 대한 규정이 없지는 않습니다. 오랫동안 띄어쓰기도 안 하고 구두점도 없이 글을 써 오다가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만들 무렵부터 문장부호에 대한 규정도 마련하기 시작하여 1989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현행 「한글 맞춤법」에도 부록으로 「문장부호」가 들어 있으니까요.

그러나 우리의 규정은 허술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한 예로 우리는 ‘14,314’에서처럼 천 단위마다 쉼표를 찍고 있습니다.
“수의 자릿점을 나열할 때 쓴다”라는, 이것도 꽤나 불투명한 표현이지만 이를 규정한 제15항의 규정을 따라서지요. 그런데
어떻습니까? ‘2007년’이라고 할 때 쉼표를 씁니까? 주민등록번호나 군번이나 또는 번지수를 적을 때도 천 단위에 쉼표를
쓰는 일이 없습니다. 영어의 경우는 이러이러할 때는 천 단위에 쉼표를 찍지 말라는 단서를 꼼꼼히 다 달아 주고 있는데
우리는 그런 게 없습니다. 국민들이 현명해서 각자 알아서 잘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문장부호 중에서 가장 효용이 큰 것은 쉼표일 것입니다. 영어의 경우 쉼표가 나머지 문장부호 전부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이 쓰인다고도 합니다. 앞의 <먹고, 쏘고, 튄다>에는 “문장부호는 언어의 교통신호와 같은 것. 속도를 늦추라는
신호를 보내기도 하고 이러저러한 것에 주목하라는 신호나 돌아가라는 신호를 보내기도 하며 또 멈추라는 신호를
보내기도 한다”라고 문장부호의 기능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런 교통신호의 역할을 가장 크게 하는 것이 바로 쉼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방면의 manual로 가장 큰 권위를 자랑하는 The Chicago Manual of Style (15판, 2003)에는
쉼표에 대한 규정이 자그마치 39개 항에 걸쳐 세세하게 베풀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점에서 아직 거의 원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특히 국어 교과서에서 쉼표를
범벅으로 만들어 놓는 걸 보면 속이 탑니다. 규정을 따르려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기는 할 것입니다. 규정에는
“대등하거나 종속적인 절이 이어질 때에 절 사이에 쓴다”고 하여 “흰 눈이 내리니, 경치가 더욱 아름답다”처럼 쉼표를
찍도록 되어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 쉼표들 중에는 독해(讀解)를 도와 주기는커녕 오히려 방해하는 것이 많은 듯합니다. 저는
“흰 눈이 내리니 경치가 더욱 아름답다”에도 쉼표가 없는 것이 나아 보입니다. 더욱이 다음 예문의 몇몇 쉼표는
세상을 우울하게 만듭니다.

(1) 세속에 얽매여, 머리 위에 푸른 하늘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주머니의 돈을 세고, 지위를 생각하고,
     명예를 생각하는 데 여념이 없거나, 또는 오욕칠정(五欲七情)에 사로잡혀,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는 데 마음에 영일(寧日)을 갖지 못하는 우리 사람이란, 어떻게 비소(卑小)하고 어떻게 저속(低俗)한 것인지...
      (이양하, 「신록 예찬」)

이양하 선생의 그 유명한 수필 「신록 예찬」 중에서 문장 앞뒤를 조금 자른 부분입니다. 애초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교과서에 실리면서 쉼표투성이가 되었지요. 그런데 이들 쉼표는 차라리 하나도 없는 게 나을 법했습니다. 특히 첫 두 개의
쉼표는 글을 버려놓기까지 하니 보기 딱합니다.
먼저 “세속에 얽매여”는 바로 다음의 “머리 위에 푸른 하늘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를 꾸민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렇다면
거기에 쉼표를 넣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 쉼표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하게 되고 그만큼 글을 바로  읽는 것을 방해하게 될 테니까요.

여기에 쉼표를 넣은 교과서 편찬자는 아마 이런 생각을 했을 법합니다. “세속에 얽매여”는 “머리 위에 푸른 하늘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뿐만 아니라 그 뒤의 “주머니의 돈을 세고”, “지위를 생각하고”, “명예를 생각하는”까지
다 꾸미는 것이라고. 그러니 그걸 나타내 주기 위해서는 쉼표가 필요하지 않느냐고. 그런데 이 문장을 그렇게 풀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언뜻 보면 그렇게 보이는데 자세히 뜯어보면 그럴 수가 없습니다. 얘기가 좀 어려워 정신을 바짝 차리셔야
할 것 같네요.

“머리 위에 푸른 하늘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주머니의 돈을 세고, 지위를 생각하고, 명예를 생각하는 데
여념이 없거나”라고 늘어놓으면 마치 “(ㄱ)머리 위에 푸른 하늘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와
“(ㄴ)주머니의 돈을 세고”, “(ㄷ)지위를 생각하고”, “(ㄷ)명예를 생각하는”이
다 대등하게 “--하는 데 여념이 없거나”에 걸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머리 위에 푸른 하늘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데 여념이 없거나”라고 말한 꼴이 되는데 이런 이상한 말이
어디 있습니까? 다시 고쳐 읽어야 할 게 분명합니다.

국어의 ‘-고’는 지난번 보았던 ‘와/과’가 명사를 대등하게 결합시켜 주듯이 동사나 형용사를 대등하게 결합시켜 주는
일을 합니다. “먹고 마셨다”든가 “산은 높고 물은 맑았다”에서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고’도 있습니다.
“모르고 그랬어요”의 ‘-고’가  그런 예인데 이때의 ‘-고’는 “모르고서 그랬어요”처럼 뒤에 ‘-서’를 붙여 ‘-고서’라고 해도
됩니다. 여기서는 의미도 대개 ‘--하기 때문에’ 정도가 되겠네요.
앞의 “머리 위에 푸른 하늘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의 ‘-고’는 바로 이런 ‘-고’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알지 못하고서”라고
해도 좋은 경우라는 것이지요. 머리 위에 그 드넓은 푸른 하늘이 있는 걸 모르기 때문에 쩨쩨하게 주머니의 돈을 세고,
지위를 생각하고, 명예를 생각하는 데 여념이 없어한다 그렇게 읽어야 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글쎄요. “머리 위에 푸른 하늘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의 쉼표를 뺀다고 해서 이렇게 바로 읽어 주리라는 보장은 없겠지요.
그러나 적어도 거기에 쉼표를 넣어서는 안 되겠지요. 그 쉼표가 하는 일이 있다면 기껏 어린 백성으로 하여금 오독(誤讀)을
부추기는 일밖에 없을 테니까요

다시 <먹고, 쏘고, 튄다>로 돌아가 앞에서 했던 얘기를 반복하면 그쪽은 그럴 책을 쓸 만한 바탕이 있는데 우리는
문장부호에 관한 한 아직 마음놓고 기댈 언덕이 없습니다. 왜 그런데다가 구두점을 찍고 그래, 왜 이런 데 쉼표를
안 찍었어 그러고 야단을 칠 때 우리가 안심하고 기댈 경전(經典)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우리가
알아서 하고 있지요. 그 대표적인 것 하나가 다음 예문처럼 문장 속에 들어 있는 인용문의 마침표 문제입니다.

(2) ㄱ.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ㄴ.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이 경우 출판사에 따라 갈립니다. 저는 이때 ㄱ에서처럼 마침표를 찍지 않는 출판사를 더 높이 평가합니다. 대개
더 권위 있는 출판사가 이쪽을 택하기도 합니다. 신문사도 이쪽인 것 같습니다. 국민들이 똑똑해 바른 길을 찾아낸
것이겠지요. 그런데 교과서에서는 꼬박꼬박 마침표를 찍지요. 제가 쓰는 아래아 한글도 마침표를 안 쓰면 빨간 줄을
좍좍 긋네요. 저는 아무리 빨간 줄이 나와도 마침표를 안 찍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다 어떻게 보면
무정부 상태에 있습니다.

얘기가 너무 길어졌네요. 그렇더라도 조금 현실적인 얘기 몇 마디만 더 하고 얘기를 끝냈으면 합니다. 아주
가벼운 것이긴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무정부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이런 것은 그래도 이러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하는 얘기입니다.
하나는 제목에 마침표를 쓰는 문제입니다. 가입인사란에 보면 “가입 인사 드립니다”에 마침표를 찍는 일이 많습니다.
자유게시판에서도 제목에 마침표가 자주 붙습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같은 제목에는 마침표를 찍지 말자는
규정도 있지만 역시 그 자리에는 마침표가 없는 게 더 편해 보입니다. 쪽지에서도 “노인봉입니다”와 같은 제목에는
마침표를 찍을 필요가 없겠지요. “노인봉 올림”에도 역시 마침표를 안 찍어야겠고요.

다른 하나는 지난번 <우리말 산책>에서도 잠깐 말씀 드렸지만 문장의 모호성을 줄여 줄 자리에는 쉼표를
쓰자는 것입니다. 예문부터 보실까요.

(3) 한참을 책읽기에 열중하고 있으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몇 권의 새로운 책들을 슬그머니
     놓고 가시던, 아이가 선생님이라고 부르기보다는 ‘할배’라고 더 많이 불렀던 老선생님이 계셨다.

(4) 지금부터 오늘날 이용되고 있는 가장 주목되는, 약을 사용하지 않고 하는 통증치료법의 개요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5) 그리다가 남은 공간이 아니라 작가의 의식적인 계획으로 남겨진, 화면의 질서와  조화를 함축하는
     여백(餘白)을 귀히 여겼다.  

앞의 예문 (3)은 얼마 전 꼬꼬마님이 올린 글에서 뽑은 건데 거기에는 쉼표가 없던 것을 제가 넣어 본 것입니다.
그리고 예문 (4)와 (5)의 쉼표야말로 아주 요긴하게 쓰였는데, 여러분들이 “과연!” 하고 고개를 끄덕끄덕 해 주실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