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산책

우리말 산책(50) -- '한글'과 '한국어'

뜰에봄 2007. 9. 17. 19:32
제가 입대할 무렵에는 논산훈련소에 ‘한글학교’라는 게 있었습니다. 그때만 하여도 한글을
읽지 못하는 병사들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요즈음은 중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이 없으면 아예
입대도 할 수 없다는데 그야말로 금석지감(今昔之感)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병사들이 ‘우리말’을 모르기야 했겠어요? 그러니까 그들이 배운 것은 ‘한글’이지
‘한국어’일 리는 없겠지요. 이제 우리 주변에 한글을 못 읽는 문맹(文盲)은 거의 없지만 만일
그들에게 야학(夜學)이라도 열어 한글을 가르친다면 그들이 배우는 것도 ‘한글’이지 ‘한국어’는
아닐 것입니다.

‘한글’은 한국어를 적는 글자 이름입니다. 중국어를 적는 글자를 한자(漢字)라 하고 일본어를 적는
글자를 카나(假名)라 하는 것과 같이 한국어를 적는 글자가 곧 ‘한글’이라는 것이지요. 영어나 독일어,
프랑스어 등을 적는 글자를 로마자라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 로마자를 흔히 알파벳이라 합니다만,
정확히는 알파벳은 한글이나 로마자처럼 자음과 모음을 따로따로 적을 수 있는 자모문자(字母文字)의
글자들, 곧 자모(字母)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한글’을 영어로 Korean Alphabet이라 하지 않습니까?)

글자와 말은 밀접한 관계에 있지만 그렇다고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하나는 아닙니다. 필요에 따라서는
영어나 일본어도 한글로 적을 수 있습니다. 여행 안내서 같은 데 보면 “저스트 어 모멘트 플리즈”니
“노, 생큐. 아임 저스트 루킹”, 또는 “오하요 고자이마스”와 같은 걸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반대로 한국어를 로마자로 적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서양인이 한국어에 대해 쓴 저술에서
“Ecey nayka ladiolo tulun caymi issnun nolaylul Kim sengsayngto tulesseyo?
와 같은 것을 흔히 볼 수 있지요. 이 예문은 예일대학에서 출판한 Beginning Korean이라는 책에서 뽑은 것으로
이른바 Yale System으로 "어제 내가 라디오로 들은 재미있는 노래를 김 선생도 들었어요?” 를
로마자화한 것인데 이 책은 한글은 한 자도 가르치지 않으면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글자와 말은 오랜 세월 묶여 오면서 마치 하나처럼 느껴지지만 헤어지려면 헤어질 수도
있는 관계입니다. 터키어는 한 때 아랍 글자로 적다가 지금은 로마자로 적습니다. 몽고어는 그들 고유의
글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걸 버리고 러시아어를 적는 키릴문자로 적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도
모택동 시절 소위 한어병음방안(漢語拼音方案)이라는 걸 만들어 한자 대신 로마자를 쓰려고 한 일도
있습니다.

한국어는 꼭 한글로 적혀야 한국어인 것은 아닙니다. 어떤 글자로 적혀도 한국어는 한국어입니다.
그리고 영어나 일본어는 한글로 적혀도 영어요 일본어입니다. 한글이 곧 한국어는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딱하게도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한글과 한국어를 혼동합니다. 특히 한글날 즈음에  신문 기자나
칼럼을 쓰는 식자층이나 마찬가지인데 한글의 우수성을 얘기하다가는 그러니 한국어도 우수하다는 식으로
넘어가는가 하면, 외래어 범람을 한탄하다가는 한글을 아끼자고 넘어갑니다. 아주 아주 다른 이야기인데
두 가지를 뒤범벅을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저는 야구팀 이름인 ‘Tigers’를 예로 들기를 좋아합니다. 만일 이 야구팀이 가슴에 ‘Tigers’ 대신 ‘타이거즈’를
붙이고 나왔다면 이들은 한글은 사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말을, 즉 한국어를 사랑한 것은 아닙니다.
만일 이들이 가슴에 ‘Horangi’라고 달고 나왔다면 어떨까요? 한글을 사랑한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타이거즈’라고 했을 때보다 훨씬 더 우리말을 사랑했다고 생각되지 않으세요?

과거엔 미개국은 그 언어도 뒤떨어진 것처럼 생각해 왔지만 지금은 언어를 두고는 우열을 가리지 않으려 하지요.
미개국의 언어도 다 놀라울 정도의 정연한 문법 체계를 갖추고 있다는 게 하나씩 밝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 미개국의 언어가 우수한 언어라면 그 언어는 비록 문자가 없어도 우수할 것입니다. 물론
그 언어가 어떤 문자로 기록되느냐에 따라 그 우수성이 달라질 수도 없겠지요.

마찬가지로 우리말이 우수하다면 그건 한글 때문이 아닙니다. 가령 우리말에는 ‘생글생글/뽀드득뽀드득/옹기종기’와
같은 의성의태어가 발달되어 있어 우수하다고 한다면 이건 한글이 있으나 없으나 달라지지 않겠지요. 경어법이
발달되어 있어 우수하다고 한다면 그것도 마찬가지겠지요. 한글이 우수하니까 우리말도 우수하다는 공식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우리말이 우수하다면 어떤 문자로 기록되어도 우수하고 우리말이 열등하다면 어떤 문자로
기록되어도 열등할 것입니다. 문자가 아예 없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마치 세종대왕에 의해 우리말이 탄생한 것처럼 말하는 것도 자주 듣습니다. 혼동의 극치라 할 만합니다.
세종대왕에 의해 우리의 문자생활은 달라졌지만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듣는 언어생활은 달라지려야 달라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앞에서 터키가 문자를 아랍문자에서 로마자로 바꾼 얘기를 했습니다만 그렇게 글자를
바꾼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말이 달라졌겠어요? 있을 수 없겠지요? 세종대왕 이전에도 우리는 말은
불편 없이 잘 하며 살았겠지요.

한글과 한국어를 동일시하는 혼돈은 이제 꽤 뿌리가 깊어진 듯합니다. 미국에서 들은 진기한 이야기 하나.
자기 집에 온 부모님 친구한테 교포 2세가 영어로 인사를 하니 그 부모 왈 “얘, 한글로 인사해야지.”
이런 사례가 이제 국내에서도 점차 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볍다면 가벼운 것이지만 TV 자막에
‘한글 번역’에 누구라고 나오는 것도 한심스럽지요. 외국어를 한국어  ‘우리말’로 번역하지 어떻게 ‘한글’로
번역하겠어요?

혼돈의 세계, 뒤범벅의 세계는 결코 좋은 세상일 수는 없겠지요. 더욱이 그게 참다운 사랑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한글과 우리말을 사랑하는 첫걸음은 이들을 그 뜻에 맞게 쓰는 일, 이들을 정확히 구별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