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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부계 남천계곡

뜰에봄 2007. 11. 12. 07:27
 

☞ 남산-대율 공간 지형도.(※그림을 클릭하면 원본사이즈로 보실 수 있습니다.)

의병투쟁은 대부분 1592년 4월 말에서 이듬해 5월 초 사이에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그리고 그 활동은 왜군 주공격군이 북진해 가고 난 후 잔류군의 노략질에 대처하는 것으로 시작해, 그 잔류부대를 축출하는 쪽으로 강도를 높여갔다. 그러면서 초유사의 조정 과정을 통해 점차 준 관군화의 길을 걸었으며, 왜군이 퇴각하자 의병 활동도 소강기에 접어들었다. 왜군은 1593년 1월 평양, 4월 서울, 5월 대구에서 퇴각해 부산으로 후퇴 집결했었다. 왜군이 철수하던 날 대구에는 명나라군 부사령관 중 한 명이던 유정(劉綎) 휘하의 군사 1만여명이 진주했다.

하지만 팔공산권 자체의 의병 활동은, 다른 지역보다 대체로 늦은 1592년 7월에야 시작됐다. 대구를 거점으로 한 왜군의 기세가 워낙 드셌기 때문. 그래서 의병대의 활동 범위도 공산성 안으로 제한됐다. 공산성 의병의 깃발을 든 사람은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1550∼1615). 쌀·콩 300섬을 모아 청도 오례산성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창의 당시의 여러 기록을 문집에 남긴 낙재는 대구 이강서원 등에 제향됐고 대구 파산동에는 그의 묘소 관리사인 '낙선재'가 있다고 했다.

팔공산 창의 의병장들 중에는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문인이 많아 특히 주목된다. 서사원이 대표격이고, 손처눌 이주 곽재겸 정사철 채몽연 손처약 등이 같은 문하생이었다. 당시 대구가 '한강학파'의 강력한 영향권에 있었음을 의미하는 듯. 한강은 김굉필의 외증손이자 퇴계·남명의 문인이었다. 성주에 살면서 퇴계에 버금갈 만큼 많은 제자를 배출했고, 왜란이 터지자 각처에 격문을 보내 창의를 독려했다. 한강 문인 외에도 최인 최계 최동보 등 경주 최씨 3숙질을 포함한 많은 인사들이 팔공산 창의에 동참했다.

팔공산에선 1596, 7년에 걸쳐 '공산회맹'(公山會盟)이란 이름의 의병장 회동도 3차례나 열렸다. 가장 성대했던 첫 회맹 때는 전라 충청 서울 등에서까지 무려 422명이나 참가하고 국가 고관들이 모임을 주도했다. 정유재란 조짐에 따라 의병장 독려를 위한 것이었던 듯 했다.

그런 가운데, 권응수 장군과 잘 협조해 가며 활동했던 의병장 중 한 사람은 부계의 송강(松岡) 홍천뢰(洪天賚, 1564∼1614) 장군이었다. 30살이 채 못됐으면서도 독립 의병대를 이끌던 홍 장군은, 권 장군과의 연합작전을 통해 큰 전과를 거뒀다. 정유재란 때 역시 많은 공을 세워 그 후 3년간 공직을 제수 받기도 했으나, 대체로는 이름내기를 꺼려 해 묻혀 살았다고 했다. 10살 위이던 여헌 장현광(1554∼1637)과 가까이 지냈다는 얘기가 들렸다.

송강 장군의 출생지인 대율리는, '남천 계곡'이라 불러둘 만한 한티재 북사면 골의 핵심 같은 마을이다. 한티재에서 내려가며 군위군 부계면의 남산리·동산리·대율리 등 순으로 마을들이 분포하는 남천 계곡은, '남천'(南川)이라는 큰 물줄기의 상류. 골의 동편에는 치산계곡, 서편에는 사창천골이 분포했다. 남천계곡의 동편 담장 격 능선은 그래서 치산계곡 및 동산계곡 이야기 때 이미 살폈었다.

사창천골과의 분수령인 남천계곡의 서편 담장 능선은 부계봉(가칭)에서 내려서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얼마 안 가 사창천골로 연결되는 찻길을 내 준 뒤 585m까지 높아졌다가 449m재로 가라앉고, 다시 542m까지 치솟았다가 '시루봉'(520m)을 거친 후 동쪽으로 진출해 높이 400m 이하인 작은실 고개를 건넌다. 그 너머에서는 다시 450∼460m 능선으로 살아났다가 또 '지심이재'(387m)로 낮아진다. 꼭대기에 절이 있고 임도로 연결된 재.


☞ 부계면 남천 계곡 대율초등학교 앞의 1천평 넘어 보이는 대율리 숲. 수백년씩 된 아름다운 소나무들로 풍광이 그림 같다. 높이 세워진 돌은 동제를 지내는 '진동단'(鎭洞壇)이고, 그 뒤쪽으로 홍천뢰 의병대장을 기리는 비가 서 있다. '송강(松岡) 홍천뢰장군 추모비'라는 제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썼다. 대율리 출신인 송강 장군이 의병대를 조련하던 곳이라 해서 숲은 '성(城) 안'이라 불린다.

그걸 지나면 지형은 다시 높은 산줄기를 동서로 펼친다. 특이한 지형. 그 산줄기의 '매봉'(631m)에서 서쪽을 향해서는 줄곧 600m 이상의 큰 산덩어리를 형성하니, 그 북사면에 일찍부터 목장이 개발되고 산나물이 많이 났다고 했다. 매봉에서 동쪽으로는 400m대 능선을 흘려보내 대율리 북편 입구를 막는다. 거의 동시에 더 동쪽에서도 남천을 향해 산줄기 하나가 도달해 입구를 막는데 동참한다. 대율리 끝머리에서 골이 산줄기들로 거의 막히는 듯한 형상을 하는 것. 그 북편 너머에 춘산리·가호리 등이 자리했다.

이렇게 양편 담장 능선이 형성된 남천계곡의 뒷담 격 팔공산 주능선은, 주봉∼서부능선∼파계재∼834m갈림봉∼한티재∼부계봉(783m) 사이의 매우 긴 구간이다. 엄청난 규모의 동산계곡이 속해 있기 때문. 그리고 남천 상류 공간은 둘로 쪼개지다시피 돼 있는 바, 주능선상의 가마바위봉(1054m봉)에서 출발해 오재봉(700m, 황청리 뒤)을 거쳐 석굴암 동네까지 내려 뻗는 산줄기가 그 분수령이다. 그 동편은 동산계곡 및 동산리, 서편은 남산계곡 및 남산리. 한티재를 출발한 팔공산 종단도로는 남산리 구간을 통해 내려가다가 앞의 그 분수령 산줄기가 끝나는 지점에서 동산리 구간으로 접어든 뒤 곧 대율리 구간으로 이어진다.

한티재 밑으로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은 둔덕마을(남산리). 남산계곡의 중심골인 '지푼실' 옆 산줄기 위에 자리 잡았다. 거기서 내려다보는 '지푼실'은 '깊은 골'이라는 말 그대로 그렇게 깊어 보일 수가 없다. 오랫동안 이 골 안의 유일한 가구였다는 집 어르신은 "지푼실은 막바지에서 도덕골과 도리미양지골로 갈라지며 도리미골로 올라가다 만나는 평평한 '노적바탕'을 지나면 '용무재'(마당재)가 나온다"며 "그 재를 넘어 용무골로 다녔었다"고 했다.

남산계곡에서 그 다음 큰 골은 '파계골'이라고 했다. 파계재를 넘어 파계사로 가는 길목의 골이어서 그런 이름이 붙은 듯. 파계골은 끝 무렵에서 동편 '바른골'과 서편 '성정골'로 갈라지며, 그 중 바른골을 통해 파계재가 이어진다고 했다. 남산계곡은 지푼실과 파계골에서 흘러내리는 물로 출발해 내려간다고 보면 될 듯 하다.

둔덕 마을에서 더 하류로 가면, 그 물 서편에 '멀미' 마을이 나타난다. 계곡 바닥에 기우제에 영험스런 '용바위'가 있다는 그 마을 안 골은 이곳 사람들이 동명면으로 다니던 길목. 그 골 위의 주능선을 넘어 남사면 참샘이골로 내왕했다는 것이다. 도달하는 곳은 기성·득명리 쪽의 '금광 길' 종점. 이 통로를 통해 땔나무를 져다 팔았다는 얘기였다. 그럴 때 둔덕마을 사람들은 한티재를 넘은 뒤 한티골을 걸어 그곳으로 합류해 왔었다고 했다.

멀미 마을 밑은 '갖골' 혹은 '지골'이라 불리는 마을. 그 어드메에 '부처골'이라는 골이 있으며, 옛날 야철지였던 듯 지금도 밭을 갈면 쇠똥이 나온다는 얘기가 들렸다. 지골은 일대의 중요한 성씨인 부림(缶林) 홍씨(洪氏)가 고려 중기 처음 이주해 들어 왔던 곳이라고 했다.

지골에서는 서북쪽으로 긴 골이 하나 넘어가니, 그 재 너머에도 '자근실'이라는 마을이 있다. 반면 지골의 더 하류 물의 동편으로는 '서원' 마을이 분포했다. '양산서원'이 있어 붙은 이름. 지금은 그 서원에 인접한 삼존석굴의 영향력이 더 큰 듯, 마을조차 '석굴암'이라 더 많이 불린다고 했다. 삼존석굴, 학소대, 양산폭포 등 절경지가 있는 곳. 남산리는 이렇게 둔덕·멀미·지골·자근실·서원(석굴암) 등 5개 자연마을들로 구성돼 있다.

남산리 하류의 동산리는 신리-황청리 두 개 마을로 구성돼 있다. '오재봉'에서 동그랗게 흘러내리는 산줄기에 의해 둘러싸인 터전. 하지만 동산리 면적의 대부분을 차지할 듯 한 인접 동산계곡은, 도로에서는 입구만 짐작될 뿐이다. 계곡 안에 전에는 '산내'(산안)라는 자연마을들이 있었으나 철거됐다고도 했다.

동산리의 밑은 대율리. 본래 강(康)씨네 터전이었다가 부림 홍씨가 많아졌다고 했다. 산골인데도 20여년 전 당시 인구가 240가구 1270명이나 되고 마을 안에서 5일장이 서기도 했다고 보고돼 있다. 하지만 도시화의 흐름은 어찌할 수 없었는지, 이곳의 지금 인구는 300여명 정도에 그칠 것이라고 했다. 뿌리깊은 문중들의 세거지답게 마을에는 유물 유적이 적잖다. 마을 입구의 숲, 마을 안 돌담 등이 형성하는 정취는 보다 특별했다.

글 박종봉 논설위원 사진 정재호 편집위원


☞ 대율리 마을 중심에 자리 잡은 '대청'(大廳). 조선 초에 초창, 1632년에 중창된 학교 건물(學舍)이라고 했다. 마을에서 가장 컸다는 '남천(南川)고택'이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있다. '상매댁'(上梅宅)이라고도 불리는 그 고택의 건축 연도는 1836년.
출처 : 자경산인[自俓山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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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홍천뢰 할배에 관한 자료를 검색하다가 어릴 때 뛰어 놀던 대청이며 성안 사진까지 있어
옮겨 왔다. 지형도에 쓰여진 낯익은 지명이 그저 반갑다.
외부인이 쓴 글이라 그런지 간혹 잘못 씌여진 이름도 있다. 갖골 ㅡ> 각골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