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청준의 수필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作家의 작은 손>(열화당, 1978)이란 산문집에 실린 <騷音에 대하여>라는 글의 한 부분입니다.
— 방음 시설이 허술한 서민 아파트의 피아노 소리, 먼지 낀 길거리의 造花 치장, 거짓과 협박기가 완연한 각종 상품 광고 말, 누구나 조금씩은 편견과 혐오감을 지니고 있기 마련인 타지방 사람들의 당당한 사투리.
사투리가 여러 달갑지 않은 항목들 속에 끼어 있는 것이 눈길을 끕니다. 그 구수하고 정겨운 사투리를 두고 왜 이런 거부감을 나타냈을까 의아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사투리에 그런 면이 있다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을 듯도 합니다. 더욱이나 ‘당당한 사투리’는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 쉽겠지요.
우리는 대개 같은 말을 쓰면 친밀감을 느낍니다. 외국에 가서 한국말 쓰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고 객지에서 고향 사투리를 들으면 이내 정이 가는 걸 누구나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말을 그만큼 사람들을 묶어 주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묶는다’는 것이 다른 시각에서 보면 다른 ‘묶음’과 분리한다는 뜻도 되는 듯합니다. 한국에서 중국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좋다고 떠들면 자기들끼리는 묶이는 것이지만 우리하고는 구분을 짓는 것이 되겠지요. 북한 사람들이 남한에 와 자기들 말투로 떠들고 다니면 역시 우리는 이질감을 느낍니다.
표준어가 왜 필요한가? 왜 표준어를 써야 하는가? 한 마디로 국민 전체를 하나로 묶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작은 교회에서조차 목사가 설교를 하면서 사투리를 쓰면 그 사투리 때문에 불편을 느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청와대의 대변인이 사투리를 쓰면 거부감을 느낄 사람이 더 많아지겠지요. 축구 시합을 중계하면서, 나아가 뉴스를 하면서 사투리를 쓰면 어떻게 될까요? 국민 모두가 편안한 마음으로 들을 수 있는 것은 결국 표준어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모두를 편안하게 하는 것, 그렇게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이 표준어의 가장 중요한 기능일 것입니다. 이것을 좀 전문적으로는 표준어의 ‘통일의 기능’이라 하지요. 온도를 화씨와 섭씨를 뒤섞어 쓰지 않고 섭씨 하나로 통일하여 씀으로써 얻는 편의를 준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쉬울지 모르겠습니다 . 표준어를 강조하면 그러면 사투리를 다 없애라는 얘기냐고 덤비는 일이 있습니다. 아니지요. 없애겠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사투리가 얼마나 소중한 자산(資産)인데 그걸 왜 없애겠어요.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친구 하나가 학교에서는 전혀 그러지 않았는데 자기 집에 가더니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바람에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저도 학생들과 여름방학 때 고향에 간 적이 있는데 학생들이 막 웃었어요. 사투리를 쓴다고. 지금도 고향 장터에 가면 “이 모개 얼매래요?” 그러고, 횟집에 가면 “행우 좀 더 주세요” 그럽니다. ‘모과’니 ‘멍게’니 하는 말을 고향 사람들에게 쓰게 되지 않습니다. 쓸 자리를 가려 쓰라는 것이지 사투리를 쓰지 말라든가 더욱이 없애라든가 그런 이야기를 누가 하겠어요?
제주도의 사례를 가지고 쓴 재미있는 석사논문이 있습니다. 시청 직원이 민원인에게 처음에는 표준어를 쓰다가 민원인이 계속 제주도 사투리로 말하면 그 직원도 제주도 사투리로 바꾼다는 것입니다. 반상회에서도 반장의 표준어로 시작된 회의가 차츰 사투리로 바뀌고, 관광 안내인이 관광객에게는 표준어로 말하다가 농장에 가서 농장 주인하고 말할 때는 사투리를 쓰고 하는 사례들이 아주 면밀히 조사된 내용입니다. 이것은 전문적으로 양층현상(兩層現象)이라고 하는 현상이 우리나라에도 있다는 것을 관찰한 것이지만, 자리를 가려 표준어를 쓸 자리에서는 표준어를 쓰는 좋은 본보기도 보여 줍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지도층에 있는 인사들이 공적인 자리에서 사투리를 쓰는 일이 많았고, 그것이 알게 모르게 표준어를 경시(輕視)하는 풍조를 부추기지 않았나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부끄러워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좀 조심해야 할 자리에서도 그야말로 너무나 ‘당당히’ 사투리를 휘두르는 경우가 많았던 게 아닌가 합니다. 각급 학교에서 표준어 교육에 얼마나 정성을 들이는지도 저는 의문입니다. 그 학생들이 장차 공직에 나가고 사회적 지도층 인사가 될 것을 대비해 표준어 교육을 잘 시켜야 하는데 그런 의식조차 없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꽤 오래 전입니다만 경상도 출신 학생한테 충격적인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자기 학교에 표준어를 쓰는 원주 출신의 교사가 와 놀림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사가 표준어를 쓰면 놀림감이 되는 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것이 우리의 교육 현장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사정이 달라졌겠지 하면서도 불안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표준어는 공부를 하였다는 간판이기도 합니다. 표준어는 어느 나라나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더 잘 배운다고 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견해가 좀 갈려 한쪽에서는 대개 자녀의 교육을 맡는 쪽이 여자이므로 그럴 것이라는 해석을 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쪽의 해석이 재미있습니다. 남자는 사회적으로 타이틀이 있어 그것으로 공부를 한 사람이라는 걸 드러낼 수 있는 반면 대개 가정주부인 여자는 그럴 길이 없어 표준어를 씀으로써 자기도 공부를 할 만큼 한 사람임을 드러내려고 한다는 해석이 그것입니다. 표준어가 간판 구실을 한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배운 사람임을 보증하는 딱지 구실을 표준어의 ‘우월의 기능’이라 하는데 사실 아무리 높은 자리에 앉았어도 사투리가 심하면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는 인상을 주는 게 사실이지요. My Fair Lady에서 오드리 헵번에게 표준어를 가르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지 않았습니까? 표준어가 한 사람의 교양을 드러내 주는 척도의 구실을 한다는 것을 대개 간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사실 이것은 우리가 매일같이 경험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불만족을 토로하는 일들이 꽤 있습니다. 그러면 서울 사람들이 시골 사람보다 잘 났다는 말이냐고. 하긴 서울 사람들이 일단 유리한 고지에 있는 건 사실이겠지요. 그러나 서울 사람들 사이에서도 배운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은 다르고, 또 시골 사람들 사이에서도 표준어가 그 사람의 수준을 평가하는 구실을 하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사투리는 지역에 따라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고 한 사회 안에서도 사회계층이나 직업, 성별 등에 따라서도 생기므로 표준어의 ‘우월의 기능’은 좀더 넓은 시각에서 보아야 하겠지요.
표준어의 기능으로 ‘준거(準據)의 기능’을 들기도 합니다. 표준어는 다같이 지키자고 만들어 놓은 일종의 규약입니다. 그 점에서 교통법규와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표준어를 부지런히 익히고 지키려고 하는 마음가짐은 교통법규를 잘 지키겠다는 태도와 같은 것으로 말하자면 준법정신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표준어는 그런 정신을 길러 주는 기능도 한다는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 누가 뭐라든 어떤 자리에서나 ‘당당히’ 사투리를 쓸 사람은 쓰겠지요. 사회가 온통 품격을 잃어 가는 마당에 표준어는 따져서 뭐하느냐고 자포자기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말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지킬 것은 지키는 사회, 질서와 품위를 소중히 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노인봉 님 ( 이익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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