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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우체통 / 강희안

뜰에봄 2009. 1. 14. 15:12

빨간 우체통 / 강희안

 

  빨간 우체통마다 활활 무덤이 자라났다. 나는 생을 저지르지 않았다. 차디찬 너의 몸에서 푸른 주검을 끄집어냈다. 그의 무덤 속엔 편지가 없었다. 익명의 사내는 당신에게 말했다. 하나님 우편에 앉은 나의 심실에서 부활의 물증을 인멸해야 한다고… 그러나 생은 스스로를 입증해야 하는 것들 투성이여서 당신조차도 내용 증명을 요구했다. 신실한 주검의 협박과 회유에 모자를 벗어 던지던, 나는 사로잡혔다. 생은 그래서 천지간을 꿰뚫는 병이 되었다. 병목현상 때문에 무덤의 길도 지연되기 일쑤였다. 너의 우편함을 열자 이합집산의 자모들이 연좌제에 걸려 있었다던가. 누구도 봉인한 적 없었으나, 애초부터 진입은 무리였다. 그의 봉투 속에서는 새소리조차 무덤덤했다. 상부로부터 지령을 어긴 푸른 낙인만 불거졌다. 어디선가 긴급한 사이렌 소리가 울려대기 시작했다. 빈 침실에선 빨갛게 구워진 나의 말이 바삭거렸다

 

  

시집 「나탈리 망세의 첼로」2008. 천년의시작  

사진 <네이버 포토앨범>

 

 

 

 

       강희안 시인

 

1965년 대전 출생

배재대 국문과 졸업 및 한남대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199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지나간 슬픔이 강물이라면」「거미는 몸에 산다」나탈리 망세의 첼로」

저서「현대문학의 이해와 감상」「석정 시의 시간과 공간」「문학의 논리와 실제」등

‘시에’ 편집위원, 배재대에 출강하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