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 마지막 날
오늘이 유월 마지막 날이다.
벌써 2009 년 한 해의 반을 훌쩍 넘겼다.
세월이 너무 빠르다는 말은 하도 많이해서 더이상 언급하기도 식상하다.
오늘저녁에는 말나리 님과 저녁 일곱시 일원역에서 만나 서울 삼성병원 으로 해아래 님 시부 문상을 갔다..
어제 해아래 님으로부터 말나리님과 나한테만은 연락을 해야할 것 같았다면서 시아버님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는데
해아래 님 시부님은 <애국지사 이철영 선생 별세> 라고 연합뉴스에도 제법 길게 나와 있었다.
그 분은 일제 강점기 강제 입대당한 뒤 소속된 일본군 병영시설 파괴공작을 세웠다가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과 옥고를 치르셨다고 한다.
돌아가시기 전에 엄청난 금액을 사회에 기부도 하셨단다.
향년 90 세이고 슬하 6 남매를 훌륭하게 잘 키우셨으니 그 또한 큰 업적이 아닌가 싶다.
해아래 님은 문상 올 생각은 말라고 하더라면 그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 생존해 계시는 애국지사도 이제 몇 분 안 계시겠구나, 싶으니 마음이 찡해온다.
장례식장 입구에는 고인의 뜻에 따라 부의금은 정중히 사절한다고 되어 있었다.
정말로 고인의 뜻인지, 아니면 자손들의 뜻인지는 몰라도 앞 서 가는 집안, 격조있는 집안이다 싶었다.
해아래 님 부부 성품만 봐도 남의 애경사에 인사차릴 건 다 차릴 사람들 같고,
육 남매나 되는 그 형제분들이 한결같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축에 드는 직함을 가지고 있어
받기로 작정하면 조의금이 엄청난 액수일텐데 , 보통사람같으면 포기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장례식장에는 조문객들이 줄을 이었다.
앞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보낸 근조화도 놓여있었다.
고인의 영전에 국화꽃 한 송이 올려드리고 잠시 기도하고 나서 상주와 경례를 했다.
나는 으례히 앉아서 반절을 할 줄 알았다.
불필요한 격식을 생략한 것도 참 바람직한 일이다 싶다.
우리 엄마 돌아가셨을 때는 굴건제복을 하고서 사람들이 조문을 올 때마다 상주들 모두가 영전앞을 지켰다.
오빠들은 곡까지 했다.
그러니 얼마나 피곤하던지...
나는 형식에 얽매이거나 남을 번거롭게 하는 것이 싫어서 우리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평소 네 부모가 내 부모 인듯이 여기던 친구 해경이와 혜경이외에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장례식장에서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이들로 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을 때도 그냥 아무일 없는 듯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구에 볼 일 있어 잠깐 내려와 있다고 했다.
고향친구들은 자연히 알게되어 문상을 많이 와 주었는데 파티마병원 장례식장 소재지인 대구에 사는 친구들이야
괜찮지만. 잠깐동안의 문상을 위해 서울에 사는 친구가 대구까지 내려 와서 밤 늦은 시간에 올라가는 걸 보고선
너무 안스러운나머지 마음이 몹시 편치않았다.
그래 역시 여기 저기 알리지 않는 게 너무 잘 한 일이라 여겨졌다.
장례식을 마치고 나서야 우리엄마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몇 몇 지기들은 너무 섭섭하다며. 나와의 관계가
겨우 그 정도밖에 아니냐는 말까지 했다.
장례식이 끝났는데도 더러 조의금을 챙겨주었다. 헌데 가까이 살아서 내가 갚을 기회가 있는 사람들은
괜찮은데 멀리 있고. 앞으로 그 댁에 뭔 일이 있을지 소식을 들을 길도 없는 분으로부터
받은 조의금은 실로 부담스러웠다.
작은 선물을 해드리긴 했지만 내가 받은 조의금에는 못 미치는 금액의 선물이어서인지
나는 아직도 그 분을 생각하면 빚을 지고 있는 느낌이다.
그런 탓에 나는 축의금이든 조의금이든간에 상대방이 딱한 형편이거나 아니면 ' 이 사람(뜰에봄)같으면 부조을 할 사람' 이라
여길 것 같은 사람에 한해 부조할 것 있이다. 라는 기준을 정해놓고 있다.
글을 쓰다보니 얘기가 뒤죽박죽이 된 것 같다.
지나고보니 집안에 애경사를 당했을 때 나처럼 알리는 않는것이 바람직하지만은 않은것 같다.
만약에 평소 나와 참 친하다고 여겼던 해아래님이 집안에 초상이 난 얘기를 하지 않았다면 몹시 섭섭했을 것 같다.
전철을 두 번이나 갈아 타고 가는 길이 수월치많은 않았지만 문상을 하고오니 마음이 한결 편하다.
또한 모처럼 말나리 님을 만날 수 있어 참 좋았다.
말나리 님으로부터 '릭 위렌' 이 쓴 <목적이 이쓰는 삶> 좋은 책선물도 받았다.
두 껀의 헤프닝은 말 못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