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랑이 머무는 뜰

[22] 어느스토커의 고백-30초의 거리

뜰에봄 2010. 4. 4. 10:33

[22] 어느스토커의 고백-30초의 거리


  

이 글은 그날, 그 나머지 20여분간에 대하여 사실만 건조하게 기록한 것이다.
기록외에는 옛사랑은 아무말도 할 수가 없는 그런 글임을 이해해 주기바란다.

핸드폰이 울렸다. 그녀는 대뜸 연어요리 얘기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택시 승강장 벤치에 앉아 있다고 했다. 당연히 옛사랑은 그 이야기는 더 이상 집중해서 듣지 않았다. 오직 한 정거장 한 정거장.. 옛사랑은 역 지도만 뚫어지게 쳐다 보았다. 옛사랑은 초조해 졌으나 어쨋던 목표역에 이를 때까지 옛사랑은 어수선한 얘기를 하며 그녀를 잡아두는 데 성공했다.

그 역을 내려서는 옛사랑은 민첩하게 내려서 개찰구를 지나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처음에는 빠른 행보였으나 곧 헉헉 거렸던 것 같다. 핸드폰으로 무엇인가 서로 말을 했으나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그녀에게 거친 호흡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말을 아꼈다. 지하철역을 벗어나는 마지막 계단을 뛰어 나온 순간, 지척으로 여겨졌던 백화점이 꽤 거리를 두고 보였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200미터는 넘어 됨직 했다. 그녀가 마침내 “왜 그리 숨을 헐떡이세요?”라고 물어 왔다. “저 녹화시간에 늦어 뛰어 가는 중입니다” 그리고는 옛사랑은 더 이상 핸드폰의 답변은 듣지 않았다. 한손에는 핸드폰, 한손에는 꽤 무게 나가는 가방을 들고 옛사랑은 전력질주를 시작했다. 이런 기회는 다시는 오지 않는다는 생각만 머리속을 꽉 채우고 있었다.

옛사랑은 전력 질주하면서 핸드폰에 귀를 갖다 대었다. 그녀는  “옛사랑님 지금 혹시 어디 아프시나요?”라고 물었던 거 같다. 옛사랑은 한마디의 대답할 호흡을 구하기조차 힘들었지만 “잠깐만요, 조금만 기다리세요”하고는 막무가내로 다시 뛰었다. 50미터의 간격을 좁히는 게 말 그대로 영원처럼 느껴졌다. 옛사랑의 체력은 정말 형편없었던 것이다.  

아무리 호흡을 해도 산소가 허파에 들어오지 않았고 고통스러웠다. 백화점 후문 지하주차장 출입구에 이르렀을 때 한계가 왔다. 그녀는 정확히 백화점 건물을 사이에 두고 맞은 편 대칭되는 곳에 있었다. 이제 우회전해서 다시 우회전 하면 그 곳이었다. 그러나 그 지점에 이르러 옛사랑은 이젠 자력으로는 뛰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뛰어온 관성에 의해 뛰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도 그녀의 목소리는 핸드폰을 통해서 울리고 있었으나 무슨 내용인지는 들리지 않았다. 옛사랑의 귀에는 오직 자신의 숨소리만 크게 울리고 있었다. 단지 그녀의 목소리가 다급해 지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된 것은 마지막 우회전을 50미터 정도 남긴 지점부터였으리라. 마지막은 멈추려 해도 멈출 힘마저 남아 있지 않았다. 구토가 나왔다. 마지막 우회전 때 가까스로 멈추어서 오륙 초 정도 백화점 모퉁이에 구토물을 쏟았다. 그리고 바로 백화점 광장으로 뛰어 들었으나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느낌 상으로는 전화가 끊긴지 삼십초도 채 되지 않은 듯 했지만 택시 승강장 어디에도 그녀는 없었다. 택시승강장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은백색의 철제 구조물이 택시 승강장 앞에 두 개가 설치되어 있었다. 사람이 겨우 걸터앉을 수 있는 그런 구조물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그냥 벤치라고 표현했던 모양이다. 초 봄이었지만 싸늘한 날씨였다. 손바닥을 대자 그 철제  구조물에서 전기처럼 짜릿하게 찬 기운이 전해져 왔다. 그 구조물 맨 끝자리 모퉁이에서 따뜻한 곳이 손에 집혔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거기 앉아 있었으리라. 가방을 놓고 그 곳을 이리저리 더듬었다.
그자리에 앉아보았다..

옛사랑은 그녀를 놓친 것이었다.
이제 이런 기회는 다시는 없을 것이다.

잠시 후 그녀와 다시 통화하면서 옛사랑은 그녀에게 참담한 눈물을 보이게 된다.
그것은 그녀에게 보이는 처음이자 마지막의 눈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