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랑이 머무는 뜰

[30] 어느스토커의 고백-꿈이야기

뜰에봄 2010. 4. 13. 16:15

[30] 어느스토커의 고백-꿈이야기


  

옛사랑의 상태는 심각했다. 차에 부딪혔음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뼈는 다치지 않았다. 그러나 거의 보름 이상을 옛사랑은 걷지 못하게 된다. 제일 부상이 심한 곳은 의외로 찢어진 손가락이었다. 겁주는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의사는 손가락을 전혀 못쓰게 될 수도 있었다고 했다. 열댓 바늘을 꿰매고 기브스를 하는 중상이었다. 바로 응급실로 가야했는데 하루 밤 묵은 것이 큰 흉터의 원인이 되었다. 옛사랑의 오른 손은 오랫동안 기관단총을 맨 모습으로 기브스를 하고 있어야 했다.

옛사랑은 생각한다. 스토킹은 과연 성공했는가 . 그녀의 모습을 정면에서 그 밝은 불빛 속에서 보았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 빛 속의 모습은 아름다웠지만 그것이 빛이 주는 효과인지 그녀가 가진 본래의 미모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모습마저 기억 속에서 희미해졌다. 그녀가 사는 아파트 단지는 확인했지만 그녀가 사는 곳은 확인하지 못했다. 빙빙 돌아다니는 그녀의 회오리 산책에 걸려 정작 스토킹의 성패를 가름하는 동호수의 확인에는 실패한 것이 아닌가.
스토킹은 실패한 것이다. 옛사랑은 주어진 작전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부상으로 전열에서 이탈한 초라한 패잔병에 불과했다. 그 문을 나서면서 그녀가 “저 지금 집에도 안 들어가고 빙빙 돌고 있어요”라고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의 단지에서 돌고 있었는지 남의 단지에서 돌고 있었는지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다시 스토킹에 나설 것인가. 옛사랑은 머리를 흔들었다. 다시 그 전장(戰場)으로 돌아 갈 수는 없었다.

금지된 만남의 벽은 이리도 높고 견고한 것인가.  방법이 없다는 말인가.
그녀에 대해 조금씩 화가 나기 시작했다.

옛사랑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
실질적으로 스토킹은 실패했지만 그녀는 그 실패를 모르고 있다. 스토킹이 시작된 것 조차 모르고 있다. 이 의식의 공백을 이용하면 그녀를 만날 수 있는 길이 있을지 모른다. 이 스토킹을 완벽히 성공한 형태로 그녀에게 각인시키면 그녀는 자포자기하지 않을까. 옛사랑을 만나주지 않을까.

옛사랑은 스토킹을 완벽히 성공한 형태로 위장할만한 모든 정황정보를 가지고 있다. 옛사랑은 생각을 거듭했다. 이 정황정보를 이용하면 백화점 질주와 같은 일차원적인 육박전이나 야간 보행에서 피를 보는 것 같은 재래식 전투는 더 이상 필요 없을 지 모른다.  

옛사랑은 몇 가지 거짓말과 몇 가지 진실을 합친 어떤 시나리오 하나를 생각하고 있었다.  

옛사랑은 결단을 내려 그녀에게 전화했다.  그녀에게 대뜸 그녀가 사는 곳에 대한 꿈을 꾸었다고 했다. 그녀는 웃었다. “저는 어느 곳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 곳은 긴 보도로 이어진 곳, 옛사랑은 한참을 걸어갔답니다. 황혼이 지고 있었지요. 아름다운 황혼이..”
“ 긴 보도의 끝에 아파트 단지가 나타났습니다. 교회의 첨탑이 있었어요. 아무도 없었고 정문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갔는데...상가가 보였습니다. 단지 사이가 넓었습니다..나무가 두 줄로 있더군요...”
옛사랑은 신비한 꿈을 보듯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하하 웃고 있었다.  
“상가에 환한 불빛이 있었습니다. 이상하게 지금도 기억이 또렷이 나는 군요. 책방이 있고 복덕방이 있고 떡집이 있었어요. 그리고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고 다시 복덕방이 하나 더 있고, 문방구와 제과점...”
옛사랑은 그 상가의 상점구성을 그대로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제야 심각해 졌다. “아니 세상에...”라고 하였다.
“상가 끝에는 은행이 있더군요. 상가를 나와서 저는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깜깜한 하늘에 뾰족한 첨탑이 보였어요. 교회의 첨탑이...상가 건물위에..상가 이층에는 중국집이 있었어요”
그녀는 경악했다.
“아니 그게 꿈속에서 보았던 것인가요?” “정말 그런 꿈을 꾸었다구요”
“우리 상가가 정말 그런데..이게 왠일 이야”

그녀는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옛사랑이 계획했던 처음의 시나리오대로 한다면 그녀가 입은 빨간 티셔츠, 청바지도 꿈에서 보았다고 할 예정이었으나 예상외로 그녀가 너무 크게 놀라고 혼란스러워 하길래 꿈 이야기는 그쯤에서 그만 두기로 했다. 혼란스러워하는 그녀가 안스럽기도 하고 너무 놀라게 해서는 뒷수습이 어렵다고 생각되었다.

그녀는 곤혹스러워했다. 꿈에서 그게 보였냐고, 정말 그런 꿈을 꾸었냐고...
옛사랑은 드디어 입을 열어 어떤 이야기 하나를 그녀에게 전해주기 시작한다.
꿈 이야기는 거짓말이라고 했으며 사실은 그녀를 직접 보았다고 말했다.

다음은 그 때 옛사랑이 그녀에게 말한 주요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1. 옛사랑은 우연히 S동에 갈일이 있었고 가다 보니 우연히 동경이란 곳을 가게 되었다.  
2 .식사를 마치고 맞은 편 거상이란 카페에서 커피를 먹고 나오는데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3. 그래서 비로소 그녀와 통화하며 본의 아니게 스토킹을 시작하게 되었다.  
4. 그녀를 뒤에서 미행하게 되면서 그 동네 정황을 잘 알게 되었다.
5. 그녀는 빙빙 돌다가 핸드폰을 끊고 그녀의 집으로 들어갔으며 옛사랑은 동호수를 알게 되었고 수첩에 적어두었다.  
6. 빨간색 반팔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그녀의 모습과 얼굴은 상가의 밝은 곳에서 자세히 잘 볼 수 있었다.
7. 옛사랑은 그 후 가까운 상가에서 생맥주를 마시고 집으로 돌아갔다.
8. 약간 키가 작았지만 커트머리 갈색 염색을 한 그녀의 얼굴은 희고 예상외로 미인이었다.
9. 본의 아니게 미행하게 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젠 서로의 얼굴을 알게 되어 공평해 진 것이 아닌가.  
10. 한번 만나 주었으면 좋겠다. 안 만나주어도 괜찮다. 보고 싶을 때는 그 아파트로 가서 먼 발치에서 한 번씩 혼자 보다가 오겠다.

담담하게 그리고 단숨에 말한 옛사랑은 침묵하고 조용히 그녀의 처분을 기다렸다. 단숨에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옛사랑이 전화 걸기 전부터 꿈 이야기와 함께 미리 구상해 두었던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도 침묵했다.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가만히 전화가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