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랑이 머무는 뜰

[44] 어느스토커의 고백-피의 선언

뜰에봄 2010. 5. 21. 09:21

  

[44] 어느스토커의 고백-피의 선언


    

초류향이라고 불렀음에도 옛사랑이 대답이 없었던 것은 그 글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옛사랑이 그 말을 보고서도 고의로 대답을 하지 않고 있다고 오해했다. 그녀는 거듭 불렀으나 역시 대답이 없었고 그녀는 옛사랑의 고의적인 대답회피에 대한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드디어 폭발했다.

그녀가 “돈”으로 옛사랑의 자존심을 위협하다가 마침내 선을 넘었듯이 옛사랑도 한심스러운 “끼”로 말미암아 끝내 그녀의 신뢰를 위협했고 마침내 선을 넘고 말았던 것이다. 옛사랑은 즉시 그녀와 통화를 시도했으나 받지 않았고 나중에는 핸드폰 마저 꺼버리고 있었다. 옛사랑은 이메일을 통해서 그녀에게 정황을 설명하고 그녀가 부르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그리고 그녀가 쁘띠 부르조아라는 비난을 싹싹하게 수용하고 사과했듯이 옛사랑도 이메일을 통하여 옛사랑이 오해의 소지를 제공한데 대해서 간곡하면서도 정중하게 사과했다.

그녀는 쁘띠 부르조아라는 애매모호한 개념조차 수용하고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는 합리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옛사랑이 음악방의 시제이로서 고객관리(?)와 접대성 발언의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그녀의 이해를 구한다면 합리적인 그녀는 수용하리라, 옛사랑은 그렇게 생각했다. 옛사랑의 정황설명과 사과에 대하여 그녀는 그 날 하루 침묵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옛사랑이 다시 음악 방을 열었을 때 그녀는 방에 들어오지 않은 상태로 메모를 통해 옛사랑과의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옛사랑의 기대와는 달랐다.

“저는 옛사랑님과 그 여자 분이 이미 오래 전부터 대화창에서가 아니라 메모로 서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게 그렇게 변명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대화창에서 옛사랑님에게 폭언을 한 것은 사과드립니다. 제 참을성이 부족했습니다.”
“옛사랑님이 그 여자 분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저는 진즉에 알고 있었습니다. 옛사랑님..저를 너무 의식하지 마시고 마음 가는 데로 하세요.”
“그 여자분, 얄팍하고 저질인 쁘띠 브루조아의 근성을 가진 저보다는 훨씬 나은 여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분은 참 소박하면서도..........”

메모는 몇 줄씩 나누어져 계속 날라 오고 있었다. 그녀의 메모가 아무리 길게 이어져도 옛사랑은 맨 처음의 메모 외에는 응답할 말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첫 메모 첫 줄부터 이미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K님. 메모 도중에 말을 끊어서 죄송합니다만 제가 그 여자 분과 오래전부터 대화창이 아니라 메모로 은밀히 이야기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건 어떻게 아셨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녀는 직감이라고 대답했다. 직감으로 벌써 알고 있었다고 대답하고 있었다.

옛사랑은 기가 막혔다. 그녀가 잘 못 알고 있는것 때문이라기 보다는 지금까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는 그녀의 그 예리한 직감이 정말 어이없이 틀린데 기가 막혔다. 그녀는 옛사랑이 술을 먹고 채팅을 할 때 논조(論調)의 미세한 차이만 보고서도 전날 술을 마셨던 것을 예리하게 알아맞혔다. 하도 족집게처럼 맞추어서 옛사랑이 마음을 먹고 위장해 보려했을 때도 그녀는 틀린 적이 없었다. 옛사랑은 그녀의 예리한 직감력을 철저히 신뢰했다. 그리고 그 직감력은 그녀 특유의 섬세하고 예민한 감수성의 안테나로부터 나오고 있다고 옛사랑은 믿고 있었다. 그런 탁월한 직감력을 가진 그녀가 이렇게 쉬운 문제에서 어처구니없이 틀리고 있었다.

옛사랑은 그녀의 직감이 틀렸다고 누누이 설명했다. 그러나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설명을 할수록 그녀는 더욱 완고하게 버티며 옛사랑이 거짓말을 하고 있고 자기를 속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옛사랑은 점차 난감해지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이 그녀를 실패하게 했는가. 그녀의 그 예민한 직감력이 무엇 때문에 저렇게 흐려졌는가. 옛사랑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직감력으로 그 사실을 알았다고 했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직감력으로 알았던 것이 아니라 상상력으로 알아내었다. 그리고 그 상상력은 평정심을 바탕으로 하는 직감력과는 달리 질투심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그녀는 질투때문에 평정심을 잃었던 것이다.

질투로 인해 받은 고통은 사실의 확인이나 오해에 대한 해명으로서는 보상이 이루어 지지 않는다. 질투로 인해 받은 고통의 유일한 보상은 상대도 그만큼의 고통을 받게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옛사랑이 고통 받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녀가 당한 만큼의 고통을 받게 하기위해 그녀는 직감력에 의한 사실 확인이라는 누명을 씌워 옛사랑이 고통을 느끼게 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위로가 필요하다고 옛사랑은 생각했다. 그녀에 대한 위로의 첫 번째 조치로서 옛사랑은 음악 방을 고별방송도 없이 정 들었던 청취자들에게 아무런 통고도 없이 하루아침에 접었다. 그리고 그러한 조치가 그녀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꾸준히 이메일을 통해 그녀에게 자신이 지나쳤고 그녀에게 대해 배려가 부족했다고 사과를 보내고 있었다. 그것은 옛사랑이 충분히 고통을 받고 있음을 그녀에게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처음에는 계속 부정하는 응답을 보내었지만 나중에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응답이 없다는 것은 그녀의 마음이 누그러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적인 사인으로 옛사랑은 해석했다.

2001년의 여름이 다 지나가고 있을 무렵..사태가 점차 호전되고 있다고 믿었던 어느 날, 아무런 소식이 없던 그녀에게서 이상한 한 줄짜리 메일 하나가 날라 왔다. 그 메일은 다시 한 번 옛사랑을 경악하게 한다.

메일의 내용은 간단했다. “완정님이 이쁘시죠? 이쁜 꽃은 다 좋아하는 옛사랑님!”
이것은 또 무슨 말인가. 그게 무슨 말인가를 묻는 옛사랑의 질문에 그녀는 응답하지 않았다. 옛사랑은 그때 조금 심사가 불편해 졌다. 그녀가 옛사랑에게 자꾸 화를 내어서 불편해 진 것이 아니라 이유를 가르쳐 주지 않기에.. 의문이 생겼을 때 해명이 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것만큼 사람을 뒤숭숭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옛사랑의 저자세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녀에게서 또 메일이 왔다.  
“옛사랑, 그대는 세상의 모든 여자를 다 사랑하지 못해서 슬픈 남자, 세상의 모든 여자를 다 사랑하지 못해서 고독한 남자. 시절도 모르고 함부로 피는 꽃 같은 남자, 종이로 만든 꽃이라도 무조건 앉아보는 헤픈 벌 같은 남자”

그 이메일을 받은 옛사랑은 또 속이 상했다. 그녀가 현재 옛사랑에게 보이는 이 시위(Demonstration)와 행태(Performance)는 그녀가 “돈”으로 옛사랑의 속을 뒤집어 놓을 때와 너무나 흡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다시 메일이 왔다.

“제 친한 친구에게 어떤 남자가 저를 따라 다닌다고 하고 옛사랑님에 관한 정보를 몇 가지 주었습니다. 약간 바람둥이 기질을 가지고 있다고 했더니 친구의 말이요. ”세상에 어디 사귈 남자가 없어서 하필이면 그런 남자가 너를 따라 다니니?!“라고 하더 군요.”

이 편지가 결정타가 되었다.

“친구의 그 말이 다 마음에 드는데 한 가지 마음에 안 드는 말이 ”하필이면“이란 단어입니다.  ”하필이면“이라뇨.. 여러 남자, 여러 방법 중에 어쩌다가란 뜻이군요. 전 K님을 여러 여자 중의 한 명으로 어쩌다가 고르지 않았습니다. K님은 제게 여러 여자 중의 한 여자가 아니고 지금까지는 유일한 여자라고 가정하고 따라 다녔습니다. 그리고 여러 방법이 있었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방법으로 K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저를 ”하필이면“ 이라고 아무 남자나 같이 취급하시나요. 전에는 ”돈“ 으로 저를 함부로 취급하시더니 이젠 (하필이면) ”사람“을 가지고 저를 함부로 취급하시는 군요.

K님. 이제는 제가 따라다니는 문제, 그렇게 고민할 것도 없고 친구랑 상의 안 하셔도 되겠습니다. 다시는 따라다니지도 않고 연락도 드리지 않으며 더 이상 괴롭히지 않겠습니다. 제가 선언한 이상 설마 하필이면그런 사람에게 K님으로 부터 먼저 전화가 오거나 연락을 할리는 절대 없을 줄로 믿겠습니다. K님, 마지막 한 가지 부탁은요. 저를 하필이면 그런 사람으로 기억하지는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그냥 조금 모자라는 로맨티스트쯤으로 기억해 주시기만 한다면 헤어져도 제 시름은 덜할 것 같습니다.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쉽게 잊어 질것 같지는 않군요. 저는 시간의 효력을 믿습니다. 시간은 지금까지 제가 살아오면서 받았던 모든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유일한 약이었습니다. 지금은 피가 뚝뚝 흐르는 이 컬러사진은 시간에 의해 점차 탈색되며 희미해지겠지요. 어느 먼 훗날, 이 사랑의 현란한 색깔들이 시간에 의해 모두 표백되고 나면 아스라이 웃고 있는 K님의 흑백 사진만이 제 가슴에 남게 되겠지요. K님이 제게 보내주었던 그 밝은 웃음...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이별의 예감은 그녀가 먼저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별의 선언은 옛사랑이 먼저 했다.

헤어짐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선언한 첫날부터 마음에서 피가 번져 나왔다.
마음의 상처는 시간이 치료할 것이다라고 옛사랑은 그녀에게 호언했다.
하루라는 분량의 소독제가 그 상처위에 뿌려졌을 때 당연히 쓰리고 아팠다.
이틀이라는 시간이 그 상처위에 다시 뿌려졌다. 더 쓰라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처는 더 아프고 더 힘들었다. 옛사랑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시간이 가도 진통은 멈추지 않았다.  
시간만 가지고서는 이 상처는 고칠 수 없다...
옛사랑은 이별의 아픔을 너무 과소평가했다.
옛사랑은 섣불리 이별을 선언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기 시작했다.


(note)


Ne Me Quitte Pas

Ne me quitte pas, il faut oublier
Tout peut s oublier qui s enfuit déjà
Oublier le temps des malentendus
Et le temps perdu à savoir comment
Oublier ces heures

qui tuaient parfois
A coups de pourquoi le coeur du bonheur
Ne me quitte pas, ne me quitte pas
Ne me quitte pas

Moi je t offrirai des perles de pluie
Venues de pays où il ne pleut pas
Je creuserai la terre jusqu après ma mort
Pour couvrir ton corps d or et de lumière

Je ferai un domaine, où l amour sera roi
Où l amour sera loi, où je serai reine
Ne me quitte pas, ne me quitte pas
Ne me quitte pas

Ne me quitte pas, je t inventerai
Des mots insensés que tu comprendras,
Je te parlerai de ces amants là qui
Ont vu deux fois leur coeur s embraser

Je te raconterai l histoire de ce roi mort
De n avoir pas pu te rencontrer
Ne me quitte pas, ne me quitte pas
Ne me quitte pas

On a vu souvent rejaillir le feu
De l ancien volcan qu on croyait trop vieux
Il est paraît-il, des terres brulées
Donnant plus de blé qu un meilleur avril

Et quand vient le soir
Pour qu un ciel flamboie
Le rouge et le noir ne s épousent ils pas
Ne me quitte pas, ne me quitte pas
Ne me quitte pas

Ne me quitte pas, je ne vais plus pleurer
Je ne vais plus parler
Je me cacherai là à te regarder
Danser et sourire et à t écouter
Chanter et puis rire

Laisse-moi devenir l ombre de ton ombre
L ombre de ta main l ombre de ton chien
Ne me quitte pas, ne me quitte pas
Ne me quitte pas


저를 떠나지 마세요.

이미 지나간 시간들은 내 다 잊으리다.  
이제는 잊어야 합니다.
우리 서로 오해했던 시간들
방법만을 찾다가 놓쳐버린 시간들
행복을 스스로 절망으로 바꾸어 버린 시간들
이제는 잊어야하는데..

그러나 저를 떠나지 마세요.

그대가 머물러 주신다면
그대에게 진주알로 만든 빗방울을
비가 내리지 않는 나라에서 캐어다가
그대에게 뿌리리다.
죽도록 땅을 파서
황금으로 그대를 덮고
빛으로 그대를 덮어
사랑이 왕이 되고
사랑이 법이 되며
그대가 왕비가 되는
그런 왕국을 만들겠습니다.

저를 떠나지 말아요.
그대를 위해서도.
그대를 위해
재미나는 이야기를 만들어
그대에게 들려드리지요.
사랑으로 거듭 불태웠던 연인들의 이야기를..
그대를 구하지 못하여
사랑 때문에 죽어버린 왕의 이야기를...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이젠 늙어 죽었다고 생각한 오래된 화산이
다시 불을 뿜고
불타버린 땅에서
황금의 사월보다도 많은 곡식이 거두어졌다고..
저녁이 되면
하늘은 붉게 타오르고
어둠은 검고 화염은 붉었으나
그 둘은 합치지 않았다고..

그대가 머물러 준다면
이젠 더 이상 울지 않고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숨어서 당신을 지켜보겠습니다.
춤추고 미소 짓는 그대 얼굴
당신의 춤추는 모습을..
그냥 숨어서 소리 없이 듣겠습니다.
당신의 노래와 당신의 웃음을..

제가 당신의 손의 그림자가 되고
당신이 사랑하는 개의 그림자가되고
당신의 그림자의 그림자가 될 수 있도록
그대 부디 허락해 주세요..

다만.
저를 떠나지만 마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