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랑이 머무는 뜰

머나먼 연가(42)-"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뜰에봄 2011. 2. 8. 19:56

 

 

뮤트는 간혹 찾아오는 빈맥과 어지러움 그리고 두통에 시달리면서도 꾸준히 성경을 읽으러 매일 어디 출근하는 사람마냥 해변을 향하고 있었다.

이 두꺼운 성경을 한번이라도 읽고 죽었으면 하는 것이 그때 뮤트의 유일한 희망이 되었다.

 

지난 번의 죽음 앞에서 보였던 뮤트의 옹졸하고 비겁한 행동에 대해서도 뮤트는 한번 더 그런 상황에 부딪히면 좀 더 의연한 모습으로 담담히 죽음을 맞이하리라 혼자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다.

그 때는 연습이 안 되어 그런 것이다.

창졸간에 당한 일이라 전혀 현실을 정리할 시간이 없었으므로 죽음을 저어했던 것이다.

뮤트는 죽음 앞에서 다시는 당황하지 않도록 인생을 정리할 일이 무엇이 남아있는가에 대해서도 이것 저것 생각하기 시작했다.

 

병의 증상이 찾아오면 인간은 그 병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 병이 가져다 주는 증상을 완화시키려고 온 신경을 집중하여 그 병을 이기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러나 그 즈음의 뮤트는 중상이 오면 괴로워는 할망정 그 증상에 집중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냥 눈을 감고 그 병의 증상이 완화되기만을 기다렸으며 진정이 되면 성경을 읽고 증상이 다시 시작되면 다시 눈을 감았다.

 

커피숍에서 서버하는 아가씨들은 그런 뮤트를 무슨 철학자처럼 생각했는지 늘 유심히 쳐다보곤 했다.

커피숍에서의 뮤트는 눈을 감고 있거나 성경을 읽거나 아니면 해변에 거니는 세 가지의 모습으로 고착되었다.

병은 나아지지도 않았고 호전되지도 않았으나 전과는 다른 점은 병의 증상이 뮤트의 걱정이나 관심을 더 이상 불러일으키지도 못했다는 점이다.

이런 생활의 어느 시점에서 죽음이 찾아 올 것이라는 생각은 분명했다.

성경을 읽는 일은 뮤트의 인생에서 마지막 몰두하는 모습이 될 것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뮤트가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기독교인이 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인간의 삶이 두려워 사회를 만들고,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는 철학자 허버트 스펜스의 말은 여전히 뮤트가 강하게 지지하는 종교관, 사회관이었다.

하나님이나 신은 사람이 만든것이지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뮤트는 믿고 있었다.

뮤트가 성경을 읽는 것은 많은 서적에서 성경에 대한 인용구가 출몰하는 데 대해 그 원전에 대한 일독 정도는 해야 한다는 막연하고 극히 세속적인 동기에 의해 읽을 뿐이었다.

 

뮤트는 무신론자였지만 집안의 내력 상 기독교와는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불교에 좀 경도된 편이었다.

뮤트의 집안은 남자들은 대부분 무신론자였으나 여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불교신자들이었다.

사찰과 부처를 섬기는 정성들이 대단하여 초파일날이면 뮤트도 할머니들의 손에 이끌려 절의 연등놀이에 참가하곤 했다.

그리고 절에 대한 막대한 재정적 후원으로 절에서 받는 대접도 융숭하였다.

뮤트는 불교도는 아니었으나 한 때 법구경을 탐독한 적도 있었다.

 

그런 그가 사이버에서 만난 여인과의 이상한 인연에 의해 이렇게 성경을 읽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성경은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에다가 1,189장 무려 180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성경을 지은 저자는 10개국, 40명에 이르고 있으며 1,600년에 걸쳐 기술되었다. 2,930명의 인물이 등장하여 등장 인물 면에서 수호지나 삼국지를 압도한다.

1551개 지역의 지명이 성경의 무대가 되고 있고 히브리어, 헬라어, 아람어 총 3개국어로 집필되었다.

그리고 이 66권의 책은 시, 산문, 수필, 묵시, 자서전, 학술서, 역사서 등 문학의 거의 모든 장르가 다 들어있다.

이러한 성경을 한 번이라도 읽어 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기독교인 들 중에서도 성경을 한번이라도 완독한 사람은 열명 중 한명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뮤트가 성경을 처음대하면서 느낀 감상은 성경이 매우 지루한 책이라는 것이다.

많은 부분에서 딱딱한 율법들이 등장하고 있었으며 스토리가 압축적이어서 한줄 사이에 40년의 세월이 순식간에 흐르는가하면 계몽적인 내용과 윤리적인 갈등을 유발시키는 장면이 도처에 등장하고 있었다.

중간에 몇 번이나 포기할 까 하였으나 담배를 끊은 사람이 담배를 다시 못 피우는 이유가 끊은 시간이 아까워 못 피운다고 하듯이 뮤트는 그 간의 읽은 페이지수가 아까워서 꾸역 꾸역 앞으로만 진도를 나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서도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허공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부르자 놀라서 당신이 누구냐고 묻는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모세가 당신의 이름을 어떻게 불러야하느냐고 묻자 여호와는 “I am who I am.” 이라고 대답한다.

이 말은 “나는 나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을 “나는 나다”라고 옮기면 안 된다.

“나는 나다”로 옮기면 이것은 “I am what I am.”의 뜻에 가깝게 된다.

who are you?라고 하면 신원(身元)을 묻는 말이다.

what are you?라고 하면 이것은 신분(身分)을 묻는 말이다.

“나는 나다.”라고 번역하면 이것은 What are you?의 답에 가깝게 된다.

 

“I am who I am.” 의 성경 번역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였다.

 

옳거니..

그것 참 잘 번역했다고 뮤트는 생각했다.

“나는 자존하는 자이니라”라는 뜻이다.

나 이외에는 모두 타존(他存), 즉 피조물이란 뜻이다.

이 부분은 성경이 허투루 번역된 책이 아님을 여실히 나타낸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自存)이니라.”

 

이 짧고 간결한 응답 부분에서 당시의 뮤트는

"와우..여호와 하나님 꽤 멋진 분이신데!.."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님 다운 카리스마있고 간결하며 선언적인 멋진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성경구절을 보내는 편지에 대해 뮤트가 그 내용에 대해 조금씩 왈가왈부하자 그녀는

"햐..뮤트님 드디어 성경읽기 시작하셨군요!!"하며 감탄하고 놀라워했다.

뮤트가 성경을 읽는 일은 그녀에게도 점차 알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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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거 이야기 하는 게 어떨지 모르겠지만..

오늘 제 과거사 고백 한 가지 할까 해요.

 

제가 20대에 학교에서 알게 된 선배 한 명이 있었습니다.

그 선배와 여러 명 어울려 그 선배의 친척이 머문

부산에 며칠 여행도 갔던 적도 있었어요.

그 때 부산이란 곳을 처음 가 봤는데 감기몸살 때문에

이틀 만에 저만 서울로 올라와 버렸지요.

 

그 선배.

저를 좋아했답니다.

원만하고 자상한 성격이었는데

이상하게 저만 보면 좀 돌출 행동을 하곤 했어요.

이래봬도 저 학교 때 인기 좋았어요.

선배가 저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제 쪽에선 별루였죠.

다만 그 선배, 너무 박식하고 글 잘 쓰는 것.

그 매력 하나는 있었답니다.

(예나 지금이나 제 약점은 박식한 사람에게 약한거..ㅠㅠ)

 

신촌의 어느 술집에서

그 선배는 술에 취해

자기가 직접 쓴 시와 그림을

보여주면서 읽어주고는

무수히 많은 사연들을

저에게 들려 주었고

저는 그냥 조용히..묵묵히 듣고 있었지요.

워낙 왕수다 (^^)라 제가 낄 틈새가 없었지요..

 

제 주위를 빙빙 돌다가 제가 별 반응이 없자

점점 제게서 멀어져 갔어요.

얼마 후 그 선배 자퇴를 하곤 홀연히 사라져버렸어요.

 

그리곤 가끔..

잊을 만 하면 전화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끊었는데..

 

어느날...

부산에서 전화가 왔는데 스님이 되었다고 하네요.

 

세월은 흐르고 흘러서

저는 한국을 떠나게 되었고

그 선배를 거의 잊어갈 무렵...

 

미국에서

처음 보는 이 멜 한 통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바로 그 선배한테 온 것이였죠.

아이러브스쿨에서 제 이멜을 발견하고

저한테 이 멜을 보내게 된 것이죠.

 

서로 이멜을 몇 번 주고 받았지만

내용은 과거를 회상하는게 대부분이었고

가까이 지내던 선후배의 근황이나 안부를 묻는 정도였어요.

 

한번은 그 선배가 이멜로 조심스럽게 묻더군요.

 

너 혹시 이혼한거 아냐?

왜 너의 가족 얘기를 하지 않니..

내 동생도 작년에 이혼했는데.. "

이러더군요.

 

전 제 얘기를 복잡하게 하기 싫어서

그냥 혼자살고 있다고 했어요.

 

컴맹인 그 선배는 독타로 저한테

이멜을 보내기 때문에 글의 내용은 거의 짧고 단순했지요.

성의 없이 보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 짧은 글을 1시간 걸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쳤다고 하더군요.

ㅎㅎㅎㅎ..

 

학교 다닐 때 절 짝사랑했다고 하면서

갑자기 이상한 말을 쓴 거 있죠.

"너는 내가 죽은 후에 내 무덤에 찾아 올 수 있겠니?“

라고..

 

글에서 이상하게 비장한 느낌이 들어서 전 그냥

“당연히 찾아가지요.”

라고 답장을 썼답니다.

 

엄청나게 많은 책을 읽고 글쓰기를 좋아했던 그 선배

드디어 책을 썼고 발간했습니다.

 

그 뒤, 그 책을 받아보았지요.

정말 오랜만에 보는 그 선배의 필체..

책속에 속세의 연인이라고 표현하면서

제 이야기도 많이 썼더군요.

당시 저는 몰랐는데

저로 인해 엄청 고민했던 내용을 자세히도 쓴 것이라..

마음이 짠 했답니다.

특히 글 중에서 “그녀는 내가 죽으면 내 무덤에 찾아온다고 약속했다.”

고 하면서 자기의 짝사랑은 그것으로 충분히 보상받게 되었다고 썼더군요.

슬퍼죠?..

 

저를 이젠 오랜 친구라고 표현하면서

10여 년간을

아침마다 부처님에게

저의 안부를 물었다고 썼더군요..

 

10여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서로 종교가 달라..

그 선배가 말하는 인연, 업보. 이런 불가 용어들이 거슬렸지만..

 

제가 뮤트님에게 이렇게 목매는 것(ㅠㅠ).

불가에서는 제가 처한 이 처지(?)를 그 선배에게 상처 주었던 업보..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네요.

 

그 선배가 자기의 부처님께 10여년을 제 안부를 물었듯이

저는 또 제 하나님께 뮤트님의 안부를 10여년 묻게 될지도 모르죠.

 

제가 큰 소리친 5500통의 편지를 다 쓸려면..

정말 아무리 적게 잡아도 10여년은 걸릴 것 같군요.

 

저는 그 선배님처럼 제가 죽으면

“뮤트님 제 무덤에 찾아와 주세요”

이런 주문은 하지 않습니다.

왜냐면요..

선배님과는 달리요..

그것으로는 제 사랑이 보상 받을 수 없기 때문이죠.

 

저는 하늘나라, 천국에 까지 뮤트님을 데리고 가고 싶어요.

뮤트님에게 성경을 읽히고

말씀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섭리를 깨닫게 하고..

예수님의 피로 뮤트님의 음탕함(ㅋㅋ),

뮤트님이 이 세상 살면서 지은 죄를 다 씻어서..

천국에 데려가고 싶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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