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나먼 연가(61)-평론(22)-Erosology의 종말(3)-
4. 사랑에 대한 근대(近代)의 이해
사랑에 대한 논의는 소피스트, 즉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다 참여했다. 특히 플라톤의 “향연”에서 에로스에 대한 사랑이 집중적으로 논해졌다. 그 이후로도 사랑에 대하여 고대로부터 중세에 걸쳐 폭넓은 논의가 이루어졌다.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에서부터 스땅달, 쇼펜하우에르, 니체, 스피노자, 알랭바디우 같은 철학자, 인본주의자들, 그리고 롤랑 바르트와 같은 문학평론가들에 의해 저서 또는 에세이 형식으로 사랑에 대한 주제가 논의되었다. 극히 최근에 이르러서는 논문형식으로는 “레스”의 사랑의 수레바퀴 이론(사랑이 친화, 자기노출, 상호의존, 욕구충족의 네 단계를 따라 수레바퀴처럼 돌아간다는 이론), 스텐버그의 사랑의 삼각이론(친밀감, 열정, 헌신에 의해 삼각대로서 지지된다는 이론), 체프만의 언어유형이론, 애착이론 등이 발표되는 등 다양한 각도에서 사랑을 조명하는 논의들이 이루어져 왔다.
1)고대로부터 중세까지의 사랑의 논점들
고대부터 중세까지의 사랑의 논의들은 주로 에로스 사랑에 집중되었고 특히 고대의 헬라철학에서 논하는 에로스 사랑은 그리스 신화의 연장선에서 논해졌던 것들이다. 그리고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아가페 사랑에 대한 강조점으로서 에로스 사랑을 대비시키는 데 한정하고 있다.
그 이후 중세 시대의 사랑에 대한 논의들은 주로 계몽주의의 입장에서 에로스 사랑만을 논의하고 있다. 쇼헨하우에르는 “모든 남녀 간의 사랑은 예외 없이 성욕이라는 본능이 특수화되고 개체화된 것뿐이다.”라고 하여 훗날 프로이드의 리비도 이론과 비슷한 결론을 제시하였다. 그의 이러한 사랑관은 인간을 자기보존과 종족보존에의 욕망, 즉 식욕과 성욕 등의 감각적 욕망으로만 가득 차 있다고 인식하는 데서 출발했다. 쇼펜하우에르는 인간의 삶과 세계의 구성에서 사랑이 가지는 포괄적 역할과 기능, 사랑의 외부효과라든가, 신(神)적 속성을 철저히 부정했다.
2)근세이후 오늘 날까지의 사랑의 논점들
근세에 이후에 이르러 당시까지 단발성에 그치는 사랑에 대한 논의가 비로소 사랑의 분류와 기능, 그 원천 등에 대한 논의로 체계화된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지그문트 프로이드의 리비도이론이다. 사랑의 원천적 에너지를 리비도에 둔 프로이드 이론은 20세기 초 세계 사상계를 휩쓸었다. 프로이드 이후에 관심을 끈 인물로는 에리히 프롬이 있다. 에리히 프롬이 쓴 “사랑의 기술”이란 책은 웬 만한 서재에는 한 권 정도는 꽂혀 있을 정도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기독교 변증가이며 “나니아 연대기”의 저자인 C.W 루이스가 “네 가지 사랑”이란 제목의 책에서 에로스, 스토르게, 필리아, 아가페 사랑에 대해 체계적으로 다루었다. 루이스의 사랑에 대한 견해는 기독교인들 뿐만 아니라 광범한 계층에게 사랑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제공했다.
사랑의 본질을 규명하려는 노력은 이러한 문학, 심리학적 측면에서의 논의에서 벗어나 과학적 탐구 분야까지 확대되었다. 오늘날에는 사랑을 인간의 뇌 속의 번연계에서 일어나는 특수한 작용으로 파악하고 그에 따른 호르몬 분비가 사랑을 유발시키는 원천이라는 이론이다. 즉 사랑을 인체의 화학적 반응으로서 규정하며 사랑을 특정 뇌나 특정 호르몬의 생화학적 반응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논의들은 결론부터 말하면 하나같이 인간의 삶과 세계의 구성에서 사랑이 가지는 포괄적 역할과 기능, 신(神)적 속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모두가 계몽주의의 연장선에서 사랑을 삶의 특수한 모습으로만 규정하고 일정 기간 호르몬의 지배를 받을 때 나타나는 일과성 현상처럼 취급하고 있다. 이런 이론들은 코끼리 뒷다리 이론들로서 도무지 부분만 취하지 본질과 전체는 파악하지 못하는 한참 모자라는 논의들만 가득할 뿐이다. 여기서는 근세에서 일단 세간의 평가를 통해 회자된 프로이드, 에리히 프롬, C.W 루이스의 사랑에 대한 논의를 비판적으로 언급하고 생. 화학적으로 사랑을 이해하는 이론의 전개만 제시한다.
3)사랑에 대한 근대(近代)의 이해
(1)프로이드(G.Freud)
프로이드는 동물적 본능의 무의식적 수준에서 작용하는 ‘리비도’의 역할이 사랑의 근원뿐 아니라 사랑의 대상을 선택하는 중요한 준거로 보았다. 사랑을 생물학적 충동으로 보는 시각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세운 혁명적 이론의 출발점이 되었다. 여기서 리비도라고 하는 것은 의식적인 사고의 차원 아래에 묻혀 있는 규칙이라고 일응 정의되는 개념인데 쉽게 말하면 성충동, 성본능을 의미한다. 프로이드에 따르면 모든 사랑의 근원은 이러한 성충동, 성본능에서 비롯된다는 것으로 사랑의 분류에서는 에로스나 포르노 사랑이 프로이드적 사랑의 원형으로 나타난다.
프로이드 이론은 개체 내에 한정된 이론으로서 사랑의 외부효과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프로이드가 상정하는 리비도 (libido)에서 원초적 자아가 가지고 있는 생물학적인 본능으로서의 성적인 에너지는 신체적 사랑, 정서적 충동, 자기애,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 그리고 우정까지 포함한다. 그리고 프로이드는 사랑의 형성이 초기 아동기 경험의 효과에 한정하고 남근기 이후의 발달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동기에서 이미 그 개인이 일생동안 펼칠 사랑의 행로가 이미 결정된 듯 한 프로이드 이론은 현대 심리학계 내에서도 상당한 비판에 직면한다.
프로이드는 현대 정신분석학의 대가니 무어니 하는 평가를 받고 있음에도 그의 이론은 사람과 사랑을 너무 편향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여기서 논하는 사랑의 논증에는 크게 참고할 것이 없다.
(2) 에리히 프롬(Erich Fromm)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고독한 존재이며, 그 고독감과 공허감을 극복하기 위하여 사람은 사랑을 하는 것” 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랑에 대한 목적론적 주장은 사랑의 분류라는 면에서는 “프라그마” 즉 현실적 사랑에 접근하는 발상이다. 사랑을 통해서 고독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결국 사랑이 주는 어떤 편익이나 실용성에 대한 발상이라고 볼 수 있다.
에리히 프롬도 합일의 문제나 용어는 달리 쓰고 있지만 사랑의 여러 형태, 에로스사랑, 스토르게 사랑, 아가페 사랑 등에 대해 논의한다. 또한 에리히 프롬은 사랑은 여타 기술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능력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사랑은 학습의 대상으로서 학습에 의해 발달하는 성질을 가진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사랑을 행동심리학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방식이다. 사랑이 부족하게 받은 어린아이는 커서 심각한 심리적 장애에 빠진다는 식으로 사랑을 파악한다.
에리히 프롬이 지향하는 사랑이란 성숙한 사랑이다. 그는 사랑을 상대에 대한 관심이며 반응이며 존중이며 행동이라는 성숙한 사랑의 조건을 제시한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들은 결합에의 열망, 초월과 창조에의 열망, 헌신의 대상과 지향의 틀에 대한 열망과 같이 다른 동물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근본적인 열망을 갖는다고 본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자신이 고독하게 탄생과 죽음의 우연에 내던져져 있다고 느낄 수 있는 존재다. 인간은 이러한 고독하고 무력한 상태로부터 벗어나 어떤 형태로든 다른 인간들과 외부세계와 결합하려고 하는 근본적인 열망을 갖는다. 사람들은 이러한 분리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술에 만취하거나 마약을 복용하기도 하며 어떤 특정한 집단과 그것이 따르는 관습이나 신앙에 자신을 복속시킨다는 것이다. 현대산업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자신의 사회적 역할과 동일화하거나 물건으로 환원하는 것을 통해서 자기를 상실하는 것을 통해서 그러한 분리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그는 ‘그 자신’이기를 그만두고 하나의 역할이나 물건이 됨으로써 자기를 망각한다.
이러한 사고를 바탕으로 에리히 프롬은 분리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하게 생산적인 길은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여러 현학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분리가 어디서 왔는지 상실이 어디서 왔는 지 고독한 탄생과 죽음의 우연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함구하고 있다. 외부와 결합하려는 근본적 욕망, 그것이 사랑의 출처하고 선언하지만 그는 이러한 분리가 왜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도 함구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사랑이란 합리적이며 어떤 성숙한 모습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한다. 사랑에 모범답안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에 모범답안이 있는가. 사랑도 성숙도에 대한 점수 매김이 가능한가. 이것은 비약이며 이상한 논리는 아닌가. 에리히 프롬은 왜 이런 이상한 논리(사람들은 이를 이상한 논리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지만)를 펴고 있는가. 이에 대한 해답은 그의 사랑의 논점은 사실 “사랑의 기술”이란 책만 의존하여서 파악할 수 없다는데 있다. 많은 사람들이 에리히 프롬의 사랑에 대한 견해를 오직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에서만 찾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논점은 그가 속한 “프랑크푸르트 학파” 전체의 학제적 방향성이 어디 있는가를 알아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지향점이 어딘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결론만 말하자면 에리히 프롬의 사랑에 대한 시각은 합리적 사회를 이루고 완성해 나가는 데 적절한 사랑을 지칭하고 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에 대해 모범 답안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사랑에는 모범답안이 없다. 사랑은 그가 생각한 만큼 그렇게 합리적으로 조절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합리적 사회를 이루고 완성해 나가는 데 기여하는 사랑은 사랑의 분류가운데 어디에 해당하는가. 아마도 “프라그마”(실용적) 사랑이 이에 근접할 것이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에 대한 논의는 결국 목적론적 사랑으로서 그가 무슨 소리를 하던 간에 “프라그마” 사랑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된다.
(3)C.S 루이스(Lewis)
루이스는 그의 저서 “네 가지 사랑”을 통해 사랑을 스토르게, 필리아, 에로스 아가페라는 네 가지 대 분류로 나누어 체계적으로 논하였다. 루이스는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로서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 그는 무신론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후에 “무신론자의 사도”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기독교의 변증가로서 알려져 있다. 그는 말기암환자였던 조이 그래샴 과의 애절한 러브 스토리를 통해 감동적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고 그 이야기는 영화화되기도 했다. 그런면에서 루이스는 이론과 실전(?)을 겸비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는 스토르게와 필리아 그리고 에로스사랑의 파괴적인 속성들이 인간을 악한 이기적 집단으로, 서로의 인격과 개별성을 무시하고 삼켜버리는 탐욕스러움이 될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으로 이끌어간다. 그는 사랑의 마지막 종착역으로 오직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 즉 ‘자비’사랑을 지목한다. 이 사랑은 모든 이전의 사랑이 끝까지 그 온전함을 잃지 않도록 만드는, 오직 ‘필요한 것이 전혀 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루이스의 사랑에 대한 견해는 각 사랑의 특징을 체계적으로 논하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으나 그 논점이 각각의 사랑이 나타내는 결점과 제한성, 그에 따른 아가페 사랑의 상대적 우위성을 강조하는 데 머무른다는 한계성도 가지고 있다. 그의 논리는 아가페 사랑과 다른 사랑과는 병렬적 비교를 통해 결국 아가페 사랑의 도움이 있어야만 다른 사랑도 온전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스토르게 사랑에서 열망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에로스 사랑의 특징 사이에 약간 인식의 혼선을 보여주는 곳도 발견된다. 또 세간의 여러 찬사와는 달리 면밀하게 읽으보면 각 사랑의 특징을 아주 명쾌하게 풀었다고 볼 수도 없다. 루이스는 파편화된 사랑이 총합으로 향할 때 아가페 사랑은 파편을 붙이는 접착제 역할을 하는 것쯤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파편적 사랑이 문제점 때문에 아가페 사랑에 보완되어진다고 할 때, 그 사랑은 파편적 사랑의 완성인가, 아니면 아가페 사랑으로 전화한 것인가에 대해서도 의문이 간다. 이런 혼선들 때문에 역시 루이스도 사랑을 온전히 구명했다고는 보기 힘들다. 막연히 아가페 사랑을 동경하고 있으며 너무 윤리적, 규 범적으로 아가페 사랑을 우위성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4) 생·화학적 반응으로서의 사랑
인간 뇌의 해부학적인 구조를 살펴보면, 가장 안쪽에는 호흡과 순환, 체온 조절 등 신체의 신진대사를 관장하는 부위가 있고 그 위를 순서대로 번연계와 신피질이라는 세 개의 뇌구조가 있다. 그 중에서 사랑을 관장하는 부위는 번연계로서 여기에서 분비되는 호르몬 활동이 사랑의 원천을 이룬다는 것이다. 생리학자들은 사랑 역시 번연계의 작용으로 보고 번연계는 사랑뿐 아니라, 증오와 미움, 분노와 공격성, 충만함과 황홀함 등의 감정을 모두 관장한다고 보고 있다.
번연계에서 다양한 호르몬들을 분비해 사랑의 감정을 조절하는 데 사랑에 빠지게 되면 가장 먼저 분비량이 늘어나는 호르몬은 도파민이라고 한다. 사랑이 더 깊어지게 되면 번연계는 도파민뿐 아니라 페닐에틸아민도 만들어낸다. 도파민과 페닐에틸아민이 몸을 한껏 들뜨게 만들면, 뇌는 이제 이 인간이 사랑을 빌미삼아 자신의 후손을 남기고 싶다는 욕구를 분출하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때 분비되는 호르몬이 옥시토신이다. 원래 옥시토신은 출산 시에 많이 분비되는 호르몬으로, 자궁 수축 기능이 있어서 아기를 밀어내는 작용을 하는 호르몬이다. 그리고 사랑을 하는 동안에 체내 마약물질로 불리는 엔도르핀 등과 같은 호르몬도 같이 분비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호르몬은 분비에 기간이 있어서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이들 호르몬들이 나와서 사랑을 유지시키지만, 18개월에서 30개월 정도 지나면 이들 호르몬의 영향력이 감소된다고 한다. 처음에는 술 한 잔만 마셔도 취하던 사람이 자꾸만 술을 먹게 되면 한 병을 다 마셔도 모자란 느낌이 드는 것처럼, 이런 호르몬들이 자꾸 방출되게 되면 어느덧 뇌에 이들에 대한 내성이 생긴다는 것이고, 그렇게 되는 기간이 약 18개월에서 30개월 정도라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토록 열렬히 사랑했던 이들이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열정도 열망도 줄어들고, 서로에 대해 무심해질 수 있다는 것이 번연계에 의한 호르몬 이론의 도달점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대부분의 동물들은 일정한 기간에만 사랑을 나눈다. 그들에게 있어 사랑은 짝짓기와 자손을 번식시키기 위한 것으로 그 시간이 지나면 그들은 서로에게 의미가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기 마련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과연 그런가. 이게 말이 되는가. 사랑은 자손번식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활동인가. 자손만 번식하면 사랑의 짝들은 서로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가 되고 마는가.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모든 과정이 진화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사랑은 진화의 산물인가. 자식만 낳으면 상대방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는 것은, 자식만 낳으면 우리 인간은 더 이상 살 만한 가치도 없는 존재라는 말과 같다. 호르몬 분비는 과연 그렇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 기능과 효과는 결코 그렇지가 않다. 에로스적인 삼년의 사랑은 전 인생에 걸쳐 파급효과를 남기며 가족사랑으로 다시 전환되어 연결된다. 그들은 반 밖에 모르는 것이다. 반풍수 집안 망친다고 반 만 아는 자들은 항상 저렇게 위험한 법이다. 호르몬이 삼년을 간다고 해서 사랑의 의미도 삼년으로 축소하고, 어쩌면 인생의 의미도 삼년에 한정하는 기막힌 논리를 펴고 있는 셈이다.
이 결론도 메트릭스 행렬에서 나왔으리라. 종축을 삼년으로 놓고 횡축을 여러 가지 호르몬으로 놓고 분석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행렬의 조합이 가리키는 대로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틀리고 있다. 그것도 엄청나게 틀리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들은 하나님, 창조주를 빼고 진화론으로 이것을 해석했기 때문에 그렇게 틀린 것이다. 창조주의 활동을 행렬에 삽입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삽입했더라도 창조주의 활동을 모두 ×표로 처리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저런 논리에 귀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