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늦은 밤에 인디카에 들렀는데 낯익은 풍경사진 한 장이 와락 내 눈길을 이끌었다. 아니? 이게 어디여? 바로 내 고향 ' 한밤'이 아닌가, 사진은 어느새 나를 고향마을로 훌쩍 데려다 주었다.
사진속의 골목을 내 고향에선 대청골목이라 부른다. 골목길을 따라 조금 더 가면 말 그대로 사방이 다 트인, 마루청만 되어 있는 대청건물이 있기 때문이다.
사진속의 기와지붕 건물은 '동천정' 이란 정자인데 내가 어릴 적에는 마을에서 연세가 가장 많은 상노인들이 모여 노시던 곳이다,
그 가운데 몇 몇분은 동천정에서 아예 기거를 하셨다. 동천정에 딸린 논이 있어 그 논을 부치는 이가 집을 관리하며 겨울엔 군불을 때었다. 마을 사람들은 제사를 지내거나 큰일을 치루면 으례히 동천정으로 음식을 챙겨 보냈고, 동천정을 드나드는
어른이 있는 집들은 돌아 가면서 간식을 챙겨드렸다. 모르긴해도 내가 지나온 시대적으로 봐서는 어른 대접을 제대로 받은 마지막 대상이 아니었나 싶다. 동천정 대문께에는 벽오동 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벽오동 열매가 익어서 떨어질 무렵이면 그 열매를 줍기 위해
동천정 대문안으로 들어서서 땅바닥을 두릿 두릿 살피기도 했다. 흰콩이 짜글짜글 쫄아든 것 처럼 생긴 벽오동 열매 껍질을 벗겨서 먹으면 제법 고소하고 맛있었다. 그렇듯 동천정을 출입하시던 어른들이 다 돌아 가시고 난 뒤 동천정에 드나다시는 어른들은 더 이상 안 계셨다.
동천정에 어른들의 기침소리가 끊긴지도 어언 삼십수년이 되겠구나.
저 산수유가 있는 집은 율리정사 라는 정자가 있는 곳인데 우리동네에는 그냥 부르기 편하게 이숙이라고 부른다. 그 정자에는 동천정에 드나드시는 어른들보다 연세가 조금 아래인 어른들이 모이셨다. 이숙에는 요즘도 어른들이 모여 노실 것이다. 객지에 있다가 고향에 오는 사람들이나 명절같은 때에는 이숙의 어른들을 찾아 뵙고 인사하는 이들이 많은데
그럴 때는 거의가 금일봉을 내 놓는지라 이숙의 어른들은 통장을 만들어놓고 그 돈을 관리한다는 얘기도 들렸다.
아, 산수유 맞은 편 담장의 집은 양주할매 집이다. 양주할배 , 할매 다 돌아 가시고, 아드님되시는 아재가 돈을 많이 들여
고쳤다고 하던데 아마 일년에 몇 차례 드나드실 뿐, 평소에는 빈 집으로 있지 싶다.
어릴 적에 나는 양주할매집을 자주 들락거렸다. 양주할매는 장성한 자녀들을 시집 장가 보내고 나서 친정 질녀 임순이를 국민학교 들 때부터 데려다가 키웠는데
나는 임순이와 무척 친하게 지냈기 때문이다. 키가 크고, 내 나이 또래 답지 않게 어른스럽던 임순이는 온갖 집안 일도 척척 해 내고, 마음도 너그러워 어떨 때는
내 보호자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임순이 고모가 되시는 양주할매는 몸집이 몹씨 뚱뚱했는데 집안에서 거동하시는 모습이 몹씨 힘들어 보였다. 임순이가 다른데 나가 노는 건 좋아하지 않으셨으나 아이들이 몰려 와서 같은 놀 적에는 너그럽게 대해 주셨다. 그러니 자연 우리가 임순이 집으로 모여드는 일이 많았다. 설 무렵부터는 양주할매집 바깥마당에 널이 놓여졌다. 반듯하게 긴 널빤지는 애초부터 널로 만들어진 것처럼 널뛰기에 맞춤했다. 아이들이 풀쩍 풀쩍 널을 뛰는 소리가 나면서 머리가 담장위로 올라 갔다 내려갔다 하던 풍경이 눈에 선하다.
예전에는 담이 저렇게 가지런하지 않고 울퉁 불퉁 튀어 나온 돌도 많아 지금보다 오히려 운치있었는데..
내 고향 한밤마을이 전통 민속마을로 지정되면서 새로이 가지런하게 쌓게 된 것이다. 대청골목은 동네 복판으로 이어지지는 길이라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많이 들락거리는 길이라 대청골목 돌담엔
유독 감물이 든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고동색 물감이 엷게 발라진 것 같은 거무스름한 감물이 말이다. 먹을 것이 귀하던 우리 어릴적에는 곧잘 생감을 따 먹기도 했는데 떫은 땡감을 먹을 때는 언제나 돌담에다 감을 대고
주먹으로 퍽 쳐서 반으로 갈라 먹었다. 그렇게 반으로 갈라 친구와 나누어 먹으면 희안하게도 떫은 맛이 훨씬 덜한 느낌이 들면서 씹다보면 들쩍한 게
그런대로 먹을만했다. 그래도 생감을 먹고 나면 속이 꽉꽉 막히며 미슥거리기도 했는데 그럴 때는 가슴을 콱콱 치면서
'뭐 먹고 얹힌노? ㅡ 감먹고 얹혔다. 와와 먹었노? ㅡ 먹고 싶어 먹었다' 라는 소리에 일정한 리듬을 얹어 반복하곤 했다. 어떤 애들은 소금을 먹으면 미슥거림이 갈아 앉는다며 소금을 갖고 다니며 먹기도 했다. 따져보면 궁기가 줄줄 흐르는 시절이었건만 왜 이다지도 애틋하고 정겨웁게 기억되는지 모르겠다.
산수유 나무 아래 저 담벼락과 대청골목 초입 첫집인 이문댁 담벼락은 햇볕도 잘 들고 담이 약간 굽어 들어
기대기가 좋았던 탓에 날씨가 쌀쌀한 철에는 그 담벼락에 기대 햇볕바라기를 하는 아이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별 말없이 발로 땅을 짓이기기도 하고, 그냥 햇볕만 쬐고 있어도 시간이 금방 갔는데.....
감물이 든 돌의 흔적은 물론 돌담에 기댄 아이들도 없구나. 아이들이 기댄 자리엔 마른 풀 넝쿨만이 자리하고 있구나. 다 어디로 갔나? 아 옛날이여,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이여~
이 사진이 저 골목길을 따라가면 다다르게 되는' 대청 ' 이다.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62호) 조선 전기에 지어진
건물로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으며, 인조 10년(1632)에 중창된 학사이며, 1632년 다시 지어 학교처럼 사용되었다고 한다.
1992년 전면 해체 보수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한여름에도 대청에서는 이불을 안 덮고 못 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시원하다. (2006 년 4 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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