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부터 숲에는 바람이 불고 있다. 세차게 지나는 바람소리가 해안으로 밀려오는 파도소리 같다.숲길에는 냑엽이 흥건히 쌓여 있으리라. 잎이 져버리면 빈 가지들만 초겨울의 하늘 아래 허허로이 남을 것이다.
가지를 떠난 잎들은 어디로 향할까? 바람에 여기저기 굴러다니다가 마침내는 어느 나무밑이나 풀뿌리 곁에 누우서 삭아지겠지. 그러다가 새봄이 오면 뿌리에 흡수되어 수액을 타고 새로운 잎이나 꽃으로 변신 할것이다. 그렇다. 가지에서 져버린 나뭇잎처럼, 떠나지 않고서는 변신이 불가능하다.
지나해 가을, 나는 그 무렵 가랑잎 구르는 소리에 몇번이고 한밤의 잠에서 깨어났었다. 말없는 산이지만 뒤꼍의 가랑잎 구르는 소리 하나를 가지고도 나를 불러 깨우곤 했었다. 그동안 세속에 무뎌진 내 귀를 맑게 씻어 주려고 그랬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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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에 어지럽게 나뒹구는 후박나무 잎들을 주어내면서 세월의 덧없음을 안으로 새기는 요즘, 내 자신도 언젠가는 이런 낙엽이 되어 흙 속에 삭아질 거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든다. 무성하던 나무 아래 짙게 내리던 그늘도 서릿바람에 많이 엷어졌다. 초록이 지쳐 물드는 산마루는 요며칠 동안 아침 안개로 운해에 떠 있는 섬이 되곤 한다.
세상에 얹혀 사는 우리들도 저마다 하나의 섬같은 존재로 여겨진다. 광대무변한 이 우주 공간에 침묵처럼 떠 있는 섬. 물론 섬은 그 뿌리를 지구라는 한 대지에 내리고 있지만, 저마다 홀로 외롭게 떠 있다. 그래서 때로는 시장기 같은 자신의 무게를 안으로 헤아린다. 우리들이 지나온 허구한 그 세월 속에서 과연 내 �의 삶을 제대로 챙겨왔는지, 되돌아 보게 하는 계절이 또한 가을이다.
가을을 흔히 사색의 계절이라고 한다. 봄, 여름, 겨울에 비해서 가을은 우리들에게 사색의 뜰을 넓혀주는 것만은 틀림없다. 철학도가 아니라도 제 발부리를 내려다보게 하고, 지금까지 어떤 삶을 이루어왔는지 스스로 묻게 한다.
이 가을에 나는 내 �을 다시 시작해 보고 싶은 소망으로 뒤끓고 있다. 보다 간소하게 살고 싶고, 보다 단순하게 지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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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는 나목이 늘어가고 있다. 응달에는 빈 가지만 앙상하고,양지쪽과 물기가 있는 골짜기에는 아직도 매달린 잎들이 남아 있다.
때가 지나도 떨어질 줄 모르고 매달려 있는 잎은 보기가 민망스럽다.때가 되면 미련없이 산뜻하게 질 수 있어야 한다.그래야 빈 자리에 새봄의 움이 틀 것이다.
꽃은 필 때도 아름다워야 하지만,질 때도 또한 아름다워야 한다. 왜냐하면 지는 꽃도 또한 꽃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생의 종말로만 생각한다면 막막하다. 그러나 죽음을 새로운 생의 시작으로도 볼 줄 안다면 생명의 질서인 죽음 앞에 보다 담담해질 것이다. 다된 생에 연연한 죽음은 추하게 보여 한 생애의 여운이 남지 않는다.
뜰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가랑잎도 하루 이틀 지나면 너절한 쓰레기나 마찬가지다. 날이 밝으면
쓸어내어 찬 그늘이 내리는 빈 뜰을 바라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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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숲에는 가을비가 적적하게 내리고 있다.또 겨우살이 채비를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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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법정스님의 수필집 '봄 여름 가을 겨울' 을 읽다가 옮겨 적어 보았습니다.
2002, 11,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