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갔다 들어 오니 탁자위에 쪽지가 하나 놓여있다.
'홍연순씨.
들렸더니 아니 계시는군요.
어디에 가셨을까?
'달의 제단' 책 가지고 갑니다.
늘 좋은 책을 전해주시는 당신은 꽃보다 아름답습니다.
후일 뵙겠습니다.
월드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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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어제 내가 심윤경의 소설 '달의 제단' 을 보고서 형님한테 갖다 보라고 전화 드렸더니 나 없을 때 다녀 가셨구나.
이런 이런,,,,책 빌려드린다꼬 나보고 꽃보다 아름답다고 하시넹. (부끄~)
월드형님은 내 꽃집 가까이 있는 월드아파트에 사신다.
나보다 나이가 한참 위이신데, 형님을 가까이 사귀고 보니 참으로 멋스러운 분이다.
형님과 안면을 익힌지는 꽤 오래되었는데 친해지기는 작년부터이다.
나도 한 때 월드아파트에 살았는데, 월드아파트에 살 당시 화요일마다 아파트에 오는 이동도서관 차에 책을 빌리러 가곤 했다.
책을 빌리러 가면 번번이 그 형님과 마주쳤는데,보아하니 나이도 많으신 분이 책 고르는 수준도 대단하고, 무엇보다도 꾸준히 독서를 하시는 모습이 너무 좋아 보였다.
내 딴엔 친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해서 언제 한번은 내가 참 재미있게 읽은 은희경의 '새의 선물'을 가르키며 '전 이 책을 너무 재미있게 읽었어요' 라며 말을 붙였더니 짧게 한마디 '봤어요' 하실 따름이었다. (성격이 좀 쌀쌀맞으신갑다^^)
그러고 또 얼마 있다가는 동사무소에서 실시하는 주민교실에 서예를 배우러 갔는데 맨 앞자리에 월드 형님이 계셨다.
나야 초보수준이지만 내 막눈으로 봐도 그 형님이 쓰시는 글씨는 보통 이상의 글씨였다.
덥썩 반가운 마음에 '붓글씨도 쓰시는군요. 너무 잘 쓰시네요' 했더니 '뭘요. 그냥 쓰는거지요' (진짜 쌀쌀맞으시넹 ^^ 뜨악~) 그러시곤 글씨쓰기에만 열중하시다가 끝나고는 챙길 것을 가지런히 챙겨서 뒤도 안 돌아보고 가시는 거였다.
알고봤더니 그 형님은 서예부분에 있어서 수상경력까지 만만찮게 지니고 계셨다.
그런 일이 있고부터 그 형님과 마주쳐도 목례만 까딱하는 정도로 지내왔다.
어느 날 그 형님이 손녀를 업고 우리 꽃집에 들리시더니 아기에게 이 꽃 저 꽃을 보여 주셨다.
손녀를 보셔서인지 표정도 전에 없이 부드럽고, 건네는 말도 인정스러웠다.
그 다음날엔 집에서 담은 고추장이라며 한 그릇 퍼 가지고 오셨다.
말이 났으니 말인데... 하시며 그 형님이 그러시는데 거꾸로 내가 그리 쌀쌀맞아 보이시더라네.(헉~)
언제 한번은 호박죽을 끓여와서 꽃집에 줄까 말까 망설이다 건어물집으로 갖다준 적도 있다고 했다. (우째 그런 일이....인상 좀 밝게 펴고 살아야겠다는 결심 *^^*)
그날 이후로 형님과 나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알고보니 그 형님은 보통분이 아니었다.
경주 양동마을이 친정으로 이문열씨와 재종간이라는데 아시는 것도 많고, 범절이며 안목이 남달랐다.
중학교때부터라나 시작해서 여태껏 일기를 써 오고 있으며 책 읽는 게 너무 너무 행복한데 행여 눈이 나빠 책 못 읽는 경우가 오면 어쩌나 싶어서 텔레비젼을 아예 보지 않는다고 하신다.
장을 집에서 담는 건 물론이거니와 아직도 이불호청은 풀먹여 다듬잇돌에 두드려서 시치는 방밥을 고수하신다네.
집에 가 봤더니 금반지따위 패물을 팔아서 마련했다는 신영복씨 글씨며 강요배씨 그림같은 것도 걸려 있었다.
형님과 이야기 하다보면 통하는 게 너무 많다.
고향도 같은 경상도이기에 무엇보다 잊혀져가는 사투리며. 옛날 시골에서 지내던 이야기라도 나올라치면 '맞어 맞어..이런 거 다른 사람들도 알려나? ' 맞장구까지 치면서 우리끼리 알아 먹는 꼬소롬한 맛을 즐긴다.. 형님은 요즘들어 사람들이 안 쓰는 사투리 같은 건 영 잊혀지고 말 것만 같은 아쉬움에 메모를 해 놓으신다고 한다.
형님한테 들은 몇가지 이야기는 기가 막히게 재미나기도 한데.'덴찌(전지)라도, 독싸(독사)아이마 �모� (살모사). 묵꾸로 (먹게)' 같은 이야기는 나중에 봐서 올려 볼 참이다.
내가 넌지시 '형님, 저 알아서 좋지예? 말을 맘대로 해도 다 알아듣고 말여요. 그런데 전에 지가 형님한테 말 붙여봤는데 와 그래 쌀쌀맞으시든지...진작 친했으면 훨씬 좋았을 거 잖아요' 하면 '그래 말이다. 그래말이다.와 그랬으꼬?...' 연거퍼 뇌이신다.
사실 형님은 본인이 생각해도 참 매몰찬 사람이었는데 언젠가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 ㅡ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라는 詩를 읽고부터는 참으로 느낀 바가 많았노라고 했다.
마음을 너그럽고 따뜻하게 가지고. 육신이 허락하는 한 봉사라도 해야지 마음먹으시고는 '아름다운 가게'에 자원봉사자 일도 신청하게 되셨단다.
' 형님 저 없을 때 댕겨가셨네요.' 전화를 걸었더니 형님께서 '세상에, 달의 제단을 쓴 작가가 서른 몇 살 밖에 안 됐구마는 우째 글을 이리도 잘 쓰고, 아는 것도 많은지 모리겠데이, 전화로 이럴 끼이 아이고 내 감또개 가지고 나갈테니 감또개 먹으면서 책 이야기 함 해 보이시더' 그러신다.
이런 저런 인연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좋은 사람과 알고 지낸다는 사실은 고맙고도 뿌듯하다.
이럴 적 마다 나는 ' 이 좋은 경치 못 보고 죽으면 어쩔뻔 했노, 이 고운 꽃 못 보고 죽으면 어쩔뻔 했노, 이 좋은 사람들 모르고 살았으면 어쩔뻔 했노....' 뭐 이런 내용의 나태주 詩를 떠 올리게 된다.
월드형님과의 인연을 비롯해서 내게 주어진 인연들을 헤아려 볼 때 난 참말로 인복이 많은 사람인 것 같다.
나와 맺어진 모든 인연에 다시금 깊이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