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랑이 머무는 뜰

[32] 어느스토커의 고백-그녀의 identity

뜰에봄 2010. 4. 13. 16:17

[32] 어느스토커의 고백-그녀의 identity




지난 번의 글 중에 미처 기억을 못해서 빼먹은 것이 있다. 그녀가 마구 퍼붓는 중에 “옛사랑님이 제게 전화해서 허락을 구했으면 제가 반드시 거절했을 거 같은가요, 멀리서 오셨으니 차라도 한잔 같이 하자고 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구요.”라고 하는 말.
그 날 그 못되게 퍼붓는 말 중에 옛사랑에게 했던 가장 우호적인 말이었다.

옛사랑은 이제 다음 행보를 잃어 버렸다. 그녀의 그 완강한 저항,  외부로부터 차단하는 그녀의 보호막은 옛사랑이 능력으로는 도저히 뚫을 수가 없었다. 옛사랑은 할 만큼 했다. 모든 수단을 다 써보았다. 그러나 안되는 것을 어쩌란 말이냐. 옛사랑은 무위의 시간 속으로 다시 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열정적인 여자였으며 감정에 솔직한 여자임은 분명했다. 화가 나면 걷잡을 수 없이 히스테리를 부렸으며 사랑의 느낌이 들 때는 서슴없이 전화해서는 콧소리도 하는 여자. 옛사랑의 엄살을 따뜻한 모성과 여성성으로 감싸 줄 줄도 알았으며 남의 슬픔과 고통을 자기 것처럼 아파하는 휴머니즘도 있는 그런 여자였다.
그 빛 속에서 본 그녀의 모습은 화사한 환영처럼 남아있다. 그녀의 맑은 목소리, 대화창에서의 간결한 문체, 옛사랑의 분방한 잡 지식에 대해 너끈히 대응하는 그녀의 해박함, 옛사랑의 예술적 감수성에 대해서는 늘 감탄과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던 그녀, 음악방송을 해보라고 며칠을 밤새워 음악파일을 장만하는 집념과 성실함... 
참 괜찮은 여자, 데리고 살아도 괜찮을 것 같고 애인을 삼아도 괜찮을 것 같은 그런 여자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한 남편의 아내로서 가정주부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 기존의 가치관과 질서의 규범에 갇혀 세상 밖으로 나올 수는 없었다.
그녀는 어항속의 고기처럼 바라 볼 수만 있는 존재였으며 유리구슬 속의 모자이크처럼 보이지만 깨어지면 안 되는 존재였다. 이제 옛사랑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신라의 선화공주를 사랑한 오늘을 사는 역사학자와 같이, 만화속의 미스 블론디를 사랑한 신문구독자와 같이 옛사랑은 사랑은 운명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것이었다.

옛사랑이 그녀의 높은 톤에서 불쾌감을 느낀 것은 그것이 옛사랑에게 심정적으로 상처를 주거나 자존심을 상하게 했기 때문에 느낀 감정만은 아니었다. 그녀의 심성에 비추어 그 문제를 반드시 높은 톤으로 하소연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인데 왜 그랬을까하는 이해할 수 없는 불가지(不可知)의 공백이 가져오는 그러한 종류의 불쾌감이었다..
그녀는 그날 이후 완정님 방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옛사랑이 관련된 모든 공간으로부터 사라졌다. 옛사랑은 자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를 겨냥했던 지난 세월이 꿈같이 느껴졌다.

벚꽃이 지고 있었다. 벚꽃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며 화려하게 피었다가 이제 비처럼 눈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그 짧은 청순함이 지고 있는 것이다. 한 때는 경탄했던 세상 사람들이 이제는 한숨을 쉬며 속절없이 그 지는 그 모습을 바라보던 어느 날 오후였다.

무심히 핸드폰 벨이 울렸다. 지금처럼 발신자 서비스가 시행되지 않을 때였으므로 발신자의 사전확인은 불가능하였다. “여보세요”하자 처음에는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옛사랑이 막 다시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그녀의 목소리였다.

목이 잠겨있었다. 울고 난 뒤의 쉰 듯한 목소리가 여실히 느껴져 왔다. 아마 울다가 결단 끝에 전화기를 손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말을 할 수록 코맹맹이 소리가 되어 갔으며 중간 중간에 코를 훌쩍이기도 했다.

“옛사랑님이 한 행동은 결코 저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옛사랑님과 한번은 만나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딱 한번, 만나야겠어요.“
그리고는 다시 잠시 침묵했다. 옛사랑은 아무소리도 하지 않았다.
“저 그때 세수도 안했고, 머리도 안 감았어요. 옷도 왜 하필 그날따라 그렇게 입고 나갔는지, 너무 급해서 그랬어요. 저요. 밉단 소리는 안 들어 보았어요. 여태껏요. 옛사랑님에게 평생 동안 제 모습을 그렇게 기억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대로 끝내면 옛사랑님은 평생 저를 그런 여자로 기억 하실 거 자나요. 평생 저를 미운 여자로 기억하실 거 자나요. 그럴 수는 없어요. 절대로...그러니 저랑 한번 만나자구요. 딱 한번 뿐이지만....그리고 그 모습만 기억하세요. 아셨어요?!!”
옛사랑이 멍하니 있자 다시 그녀가 확인했다. “제 말 듣고 있나요. 아셨냐구요!!” 그녀가 소리를 꽥 질렀다.
“네네. 알았습니다.”
옛사랑은 마님의 호령을 듣는 마당쇠처럼 큰 목소리로 황급히 대답했다.
“제게 전화하지는 마세요. 만나는 날짜는 제가 또 전화 드릴테니요.”
그리고는 전화가 끊겼다.

창졸간에 받은 전화였다. 전화 중에 옛사랑은 처음의 “여보세요”와 “네네 알았습니다.”라는 두 마디 밖에 할 수 없었다.
옛사랑은 그때의 그녀의 모습을 그렇게 밉게 생각하거나 못생겼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자세히 보았다는 것은 거짓말 이었다. 단지 반팔이라 건강한 여자로군 이런 생각은 했던 거 같다.

한참 생각하다가 픽 웃음이 나왔다.
여자란 정말 알 수 없는 존재이다.
목적과 수단의 정당성보다는 자기 정체성, 즉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늘 우선한다.
그녀가 왜 그렇게 높은 톤으로 소리를 질렀는지 그때야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어리둥절한 시간이 지나자 그때서야 마음에 잔잔한 기쁨이 조금씩 밀려왔다.
옛사랑의 공들인 시나리오가 아주 쓸모 없지는 않았다.
다시 전화하겠다는 그녀의 마음이 변치 않기만을 바랐다.

그녀의 전화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note)

그대 창밖에서 -김금희 노래
(박화목 작시 / 임긍수 작곡)

그대 그리워 노래하네
휘영청 밝은 달빛아래
애절한 나의 노래 듣는가

두견새 혼자 울어예는 밤
이 마음 저 밤새와 같이
이 밤 허비며 사랑노래 부르네

괴로운 내 가슴속엔 한떨기 장미
오 내사랑 말해다오
애타는 이 마음 어이해 들어주오

저 달이 지도록 나 그대 창가밑에
서성이면서 기다리네
오 내사랑아 내 사랑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