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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랑이 머무는 뜰
(47)어느스토커의 고백-마지막 바람
뜰에봄
2010. 7. 18. 23:45
(47)어느스토커의 고백-마지막 바람
음악 방을 가운데 두고 안팎으로 그녀와 서로 대치하고 있는 상태, 그것은 마치 긴 참호전과 같았다. 전장에서 길게 이어진 참호를 지키며 상대의 포성을 은은히 들으며 견뎌야하는 병사처럼 옛사랑은 그렇게 밤을 보내고 있었다. 미련의 승부를 결딴내려고 했으면 그때가 마지막 기회였던 것 같다. 그때 옛사랑이 그녀에게 백기를 들고 투항했어야했다. 그녀가 보내오는 발라드의 가사들은 옛사랑이 투항할 것을 권고하고 있었다. 발라드의 가사가 모두 그런 내용은 아니었지만 그 곡들 중 몇 곡은 지금이라도 잘못했다고 하고 투항한다면 받아줄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전하고 있다. 처음에 그녀와 갈등을 빚었을 때는 마치 물속에서 오래 버티기를 하는 양상이었고 그녀는 싹싹하게 먼저 고개를 내밀고 옛사랑에게 투항해 왔다. 이제 이 참호전에서는 옛사랑이 그녀에게 투항할 차례이며 그녀로 부터의 투항은 없다는 것을 노랫말을 통하여 옛사랑에게 분명히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왠일인지 옛사랑은 계속 뭉기적거리며 꾸물대고 있었다.
투항하는 대신에 옛사랑은 마침 연구프로젝터의 일로 참호를 나와 외국으로 긴 출장을 떠나게 된다. 옛사랑은 투항할 때 투항하지 못했고 참호에서 나와서는 외국으로 철군해 버린 꼴이 된 것이다. 그녀에게 음악 방에는 상당기간 참여하지 못한다는 메시지도 남기지 않은 채 옛사랑은 도망치듯 한국을 떠났다. 외국에서 일을 보면서도 그녀에게 아무런 메시지도 남기지 않고 떠나온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시차에 의해 외지의 낮 시간은 한국은 밤 시간이 된다. 지금쯤 그녀는 음악 방을 열고 있으리라. 언제고 부터 사라진 그 익명의 청취자를 그녀가 얼마나 궁금해 하며 기다리고 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여름의 폭염이 완전히 사라지고 가을이 힐끗 느껴질 때 옛사랑은 한국을 떠났으나 돌아왔을 때는 가을이 깊어 있었다. 공항에 내릴 때부터 옛사랑은 불안해 졌다. 계절이 변한 것처럼 그녀도 변했을지 모른다. 기다림을 포기했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도착한 그날로 옛사랑은 황급히 그녀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밤 1시부터 새벽 5시까지 시계처럼 정확히 방송하던 그녀의 음악 방은 보이지 않았다. 옛사랑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떠나 버린 것일까. 그러나 옛사랑은 다시 그녀를 발견해 낸다. 처음에 그녀의 음악 방송을 낮 시간에 찾다가 실패한 것처럼 옛사랑은 이번엔 밤 시간만 찾아다니다 실패했다. 그녀는 떠나지 않았으며 옛사랑이 그녀를 발견한 것은 낮 시간의 천리안에서 였다. 그녀는 낮에 방송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밤에서 낮으로 방송시간대를 옮긴 것이다. 그녀를 발견했을 때의 옛사랑의 안도와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 공백의 기간 동안 그녀의 방송은 놀랍게도 십여 명의 청취자를 확보해 놓고 있었다. 옛사랑은 다시 외부에서 접속하는 익명의 청취자로 방송에 참여했다. 그러나 낮은 밤 시간과는 달리 일을 하면서 음악만 걸어놓고 접속해 있는 익명의 청취자들이 많은 법이다. 옛사랑은 윈 앰프를 깜빡이며 그 만의 모르스부호를 보내며 자신의 존재를 그녀에게 알리려 했으나 그녀는 눈치 채지 못하는 듯 했다.
처음에는 몰랐으나 며칠 간 그녀의 음악을 들으며 옛사랑은 그녀가 새벽방송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서 방송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새벽방송의 어둡고도 침울한 분위기는 간 곳없었다. 그녀는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걸핏하면 멘트를 해 대었으며 밝은 목소리로 재잘대며 까르르 웃고 있었다. 그녀의 웃음 속에는 어떤 미련의 갈등이나 이별의 고통은 묻어 있지 않았다. 그녀의 밝은 멘트 속에는, 그녀의 행복한 웃음 속에는 옛사랑에 대한 추억 따위는 더 이상 없이 보였다. 당연히 옛사랑에게 규칙적으로 보내던 그 발라드 꾸러미도 사라지고 없었다. 며칠을 들어야 겨우 한번쯤 그때의 그 피가 묻어나던 그 애절한 발라드가 한 곡정도 올라왔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 절실하고 애절했던 눈물의 발라드가 댄싱곡 풍 사이에서 구색 맞추기 식으로 올라올 때는 그야말로 초라한 유치뽕짝의 값싼 노래로 바뀌어져 있었다.
옛사랑의 시선은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어둡고 불안해 지기 시작하였다.
아..그녀는 옛사랑을 잊었는가. 옛사랑의 그 타오르던 눈동자를 잊었단 말인가.
더욱 가관인 것은 그녀가 매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멘트로 언급하는 인물하나가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가을이라고 불리는 한 캐럭터에 대해 그녀는 매일 콧소리를 내며 아양을 떨고 있었다. 가을이란 인간에 대해 그녀의 칭송과 칭찬은 연일 계속 되었다. 옛사랑은 배알이 꼴려서 도무지 들을 수 없을 지경까지 그녀의 가을이에 대한 연모와 칭찬은 계속되었다. 어느 날 오후 그녀의 방송에 접속한 순간 가을이란 사람에게 날리는 그녀의 멘트는 독사의 혀 사건이래로 옛사랑을 다시 한 번 광분시키게 된다.
“가을이님은 정말 대단하세요. 제가 세상으로는 잘 나가지 않는 사람이지만 호기심 때문에 꼭 한번 알려주신 곳으로 찾아가야겠어요. 제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군요. 정말 말씀하신 그대로 인지...변하지 않고 평생을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호호...중간에 헤어지는 것처럼 가슴 아픈 것은 없답니다. 이래 뵈도 제 마음에만 들면 제 쪽에서 체인징 파트너 하는 일은 없는 사람입니다. 애지중지 사랑하면서 아껴 드리죠. 그러나 제 마음에 들기가 쉽지 않을 걸요 제 눈이 보통은 넘거든요. 호호..”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들리는 멘트였지만 여기에 이르러 옛사랑은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온몸을 떨면서 화를 내기 시작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옛사랑은 이제 그녀에 대해 어떤 권리도 주장할 입장에 있지 않았다. 그녀와 옛사랑은 공식적으로 이별에 대한 합의를 문서로서 교환한 이상 남녀로서는 이미 청산된 관계였다. 그리고 그 뒤로 어떤 관계개선의 노력도 없이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흘러버리지 않았는가. 그러나 옛사랑은 그 순간은 자기도 모르게 그 사실을 까맣게 잊게 된다. 그는 마치 외국에 돈 벌러 간 사이에 아내의 물륜을 뒤늦게 알게 된 남자처럼 분노하고 있었다.
그는 펜을 꺼내었다. 펜으로 독사의 혀에서 뿜어 나오는 독을 찍어서 그는 순식간에 한 장의 편지를 휘갈겨 그녀에게 이메일로 부친다.
“안녕하세요. K님. 좋은 가을입니다. 그 동안 별고 무탈하신지요. 늘 가을이면 심란했습니다만 올해의 이 계절은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 같습니다. 요즘은 ”새로운 출발“ 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참 우리 이미 헤어졌던 가요. 우리 사이, 새삼스럽게 서로 편지를 쓸 일도 없는데 왠지 글 한줄 써 보고 싶군요. 부디 너무 나무라지는 마시길 바랍니다.”
마음속에서는 분노가 화산처럼 폭발하고 있었으나 옛사랑은 입을 악물고 냉정한 이성으로 쓰는 글처럼 서두를 위장했다.
“저 사실 K님과 헤어지고 나서 무지 힘들었답니다. 제가 K님 방송 몰래 들었던 것 아시죠. 힘들어서 그랬습니다. 용서하시죠. 몰래 들을수록 더 힘들어서 마침내 그만 두었지요. 늘 힘들어서 제가 회복할 수가 있을까 걱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K님 방송 다시 들으며 저는 비로소 희망을 가지게 되는군요. 한때는 영원히 안 들으리라고 생각했지만 다시 듣고 K님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이 제겐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제 K님을 잊기가 쉬워졌습니다. 아주 아무렇지도 않게 이젠 정말 잊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K님이 그렇게 헤픈 여자일 줄 몰랐습니다. 그렇게 아무 남자 앞에서 앞가슴을 마구 풀어헤치는 그런 여자인줄을 제가 까맣게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번의 방송을 들으며 K님의 그 교태스러운 웃음, 만인의 대중 앞에서 아양 떠는 모습. 정말 가관이더군요. 그 동안 제가 괜히 K님도 저처럼 아파할 것이라 지레 걱정하며 가슴앓이를 했던 자신이 어이없어 지더군요. 그러나 K님의 본래의 모습을 본 것이 제겐 참 다행한 일입니다. 제 가슴 속에 소중하게 남아있는 K님의 사진을 이제는 더러운 휴지처럼 가볍게 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휴지처럼 버릴 수 있다는 것은 평생 간직하며 살아야한다는 부담에서 얼마나 저를 자유케 하는지 모른답니다.”
“헤어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리 쉽게 가을이란 사람을 또 연모하기 시작하신 K님. 가을이란 분을 만나러 가야겠다구요. 한번 마음에 들면 체인징 파트너 하는 일은 없을 거라구요. 애지중지하면서 사랑해 드리겠다구요. 멋지십니다. 저랑 사이버 창에서 대화를 나누면서 그렇게도 다른 사람이 알까 전전긍긍하시더니 이젠 대답해지신 K님. 한 번 연애를 해보니 점점 세상 눈치 볼 것 없다는 것을 깨달으신 모양이죠?”
“K님! 조리 돌림이란 말 아시죠. 마을에서 나쁜 짓을 했거나 패륜한 사람에게 거적을 씌워 동네를 돌면서 마을 사람들의 돌팔매를 견뎌야하는 관습법적 형벌이지요. 특히 여자가 외간남자와 정을 통하다 들켰을 때 때 그 조리돌림이란 벌은 동네에서 속죄하는 가장 흔한 사적인 형벌이었답니다. 이쯤해서 가을님에게 그리고 듣는 이들에게 옛사랑과 이미 그런 경험이 있다고 고백하시는 것이 어떨지요. 가을이님에게 옛사랑이란 그 남자 사랑했었으며 헤어진 지 얼마 안 되었다고 공개적으로 만인 앞에 선포하는 것이 어떨까요. 그래도 가을님이 K님에게 관심이 있다고 하시면 그때 찾아뵈어도 늦지 않을 듯 요. 사이버 창이나마 조리돌림이라도 하시고 나서 새로운 사랑 시작하는 것이 개운 할 텐데요.”
옛사랑은 그녀가 질투했을 때는 어이없어하고 기막혀 했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이 질투의 마신에 사로잡힌 것은 모르고 있었다.
남자의 질투는 여자의 그것보다 본질적으로 더 강하고 더 광범위한 것이다.
남자의 질투는 남녀관계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정복욕, 성취욕을 지배하는 근본적인 심리기저이다.
질투는 무한 질주의 폭주기관차와 같아서 충돌해서 파괴될 때야만 비로소 멈춘다.
옛사랑이 탄 이 질투라는 폭주 기관차
그것은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할지 모른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게 할지도 모른다.
옛사랑이 그녀에게 보낸 편지.
그것은 마지막 바람이었다.
(note)
The music played/Matt Monro
An angry silence stayed where love had been
And in your eyes a look I've never seen
If I had found the words you might have stayed
But as I turned to speak the music played
As lovers danced their way around the floor
I suddenly watched you walk forward the door
I heard friends of yours suggest you to stay
And as you took his hand the music played
Across the darkened room the fatal signs I saw
We'd been something more than friends before
Well, I was hurting you by cling to my pride
He had been waiting
and as I drove him to your side
I couldn't say the things
I should have said
Refused to let my heart control my head
But I was made to see the pride I paid
and as he held you close
The music played
And as I lost your love
the music played.
음악이 흘렀을 때
사랑이 있어야할 곳에 분노의 침묵만이 있었지요.
그리고, 전에는 결코 본적이 없던 당신의 그 눈빛
내가 할 말을 찾아내었다면 당신은 떠나지 않았을 텐데..
마침 내가 말하려 돌아섰을 때
하필 그 때 음악이 흘렀답니다.
연인들이 마루를 돌며 춤을 출 때
당신이 문 쪽으로 걸어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당신친구들이 당신에게 춤추러 나가지 말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당신이 그 남자의 손을 잡았을 때
그때 음악이 흘렀답니다.
어두운 무도장 저편에
힐끗 보이는 파국의 그림자
우리는 전에는 분명 친구 이상이었는데
나는 자존심에 사로잡혀 당신에게 상처를 줍니다.
그 남자가 기다리고 있군요.
결국에는 내가 그 남자를 당신에게 보내는군요.
난 말했어야 했을 때 하지 못했고
감정보다는 이성을 따라야했는데
이젠 못난 나의 자존심 때문에
당신을 잃게 되는군요.
그 남자가 당신을 가까이 껴안을 때,
음악은 흐르고 있었지요.
사랑을 잃어버리는 그 순간
음악은 흐르고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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