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산책

노인봉의 우리말 산책(15) - 꾀꼬리 소리

뜰에봄 2007. 9. 12. 15:27

 

 

 


4월 말일까지도 안 들리던 꾀꼬리 소리가 5월 초하루가 되자 무슨 기적과도 같이 숲 속 이곳저곳에서
울려 퍼졌습니다. 새로 이사 온 곳의 자랑 겸 그 이야기를 월류봉 님한테 하였더니 당신도 5월 1일자
수첩에다 ‘꾀꼬리’라 메모를 해 두셨다더군요. 꾀꼬리가 좀체 모습은 안 보여 주지만 그 울림 좋은 목소리로
숲을 채울 때는 온통 새 세상이 열리는 듯 우리 마음도 한없이 맑아지지요.

새소리가 대개는 곱지만 그중 고운 소리를 곱으라면 단연코 꾀꼬리 소리가 아닐까요? 그래서
우리 선인(先人)들도 고운 목소리를 꾀꼬리 소리 같다고 해 온 거겠지요. 특히 여인의 고운 목소리를 두고
“꾀꼬리처럼 예쁘다”는 표현은 얼마나 흔히들 썼는지 이제는 신선미가 없는 상투어(常套語)가 되다시피
하지 않았습니까? 그만큼 ‘꾀꼬리 소리’는 누구에나 낯익은 말이지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꾀꼬리 소리를 아는 사람이 의외로 적다는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한 번 물어
보세요. 아니 한 40명쯤 모인 교실에 들어가 학생들에게 물어 보세요. 어느 날 꾀꼬리 소리가 들리면
아, 꾀꼬리가 왔네 하고 꾀꼬리 소리를 구별할 줄 아는 사람 있느냐고. “예”라는 대답을 듣기가 참으로
어려울 것입니다. 꾀꼬리 소리를 한 번도 못 들어 보았다는 사람이 대부분이지요.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사람들이 “꾀꼬리 소리처럼 고운 목소리”라는 표현을 듣고 아주 태평스럽다는
거지요. “꾀꼬리 소리? 대체 꾀꼬리 소리가 어떤 소리일까” 그런 의문을 나타내야 당연할 법한데 전혀
그러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꾀꼬리 소리쯤이야 으레 아는 소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모르면서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일이 어디 한두 가지겠어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앎이라고 한 것은 공자 말씀이었던가요? 모른다는 것도 모르는 것이야말로
무지(無知)이겠지요. 우리가 대부분 그런 무지 속에서 사는 예로 이 꾀꼬리 소리의 예만큼 좋은 예도
드물지 않나 싶습니다. 하나도 서툴게 느껴지지 않고 그래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모르고 있는 일, ‘꾀꼬리 소리’야말로 그 대표적 보기가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어떨까요? ‘꾀꼬리 소리’를 전혀 들어 본 일도 없는 사람이 “꾀꼬리 소리 같은 고운”이라는
표현을 스스로 쓰는 일도 있지 않을까요? 물론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거야 고운 소리의 대명사가
되었으니 크게 책임질 일도 없다고 생각하겠지요. 무심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이”라는 표현을
쓰듯이 말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어느 학생이 썼던 ‘코스모스 향기’라는 표현도 떠오릅니다. 꽃은 으레 향기가 있다는
통념이 있습니다. 그래서 코스모스도 향기가 있겠거니 하고 스스로 한 번도 맡아 본 일이 없으면서
‘코스모스 향기’라는 표현을 무심결에 썼겠지요. 그런데 어떻습니까?  코스모스는 향기로 사랑을 받는
꽃이 아니기도 하지만 향기랄 게 없는 꽃이 아닌가요?

“아, 푸른 하늘”이라는 단순한 표현에서도 그 사람이 정말 그 푸른 하늘에 빨려들어 가 본 사람이
그렇게 표현했을 때와 그저 남들이 하는 걸 따라 겉멋으로 그렇게 표현한 것은 벌써 읽는 사람에게
달리 전달된다고 생각합니다. 진정이 담긴 것은 어떻게 전달되어도 전달되고, 거짓은 어떻게 드러나도
드러나는 것이겠지요.

해마다 꾀꼬리가 찾아와 그 청아한 목청을 들려주는 일은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금년 5월은
이 꾀꼬리 소리로 멋지게 열려 기쁨이 큽니다. 하이네의 시에 슈만이 곡을 붙인
연가곡 <시인의 사랑> 중에 <이 경이롭도록 아름다운 오월에>라는 노래가 있지요?
그 노래를 흥얼거리며 이제 뒷산으로 나가 보아야겠습니다.

눈부신 5월입니다. 꾀꼬리의 5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