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산책

노인봉의 우리말 산책(22) - '갓길'과 '가득'

뜰에봄 2007. 9. 12. 15:37
피서철이 절정에 오르면서 영동고속도로는 예년 같지는 않았으나 넘치는 차량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습니다. 갓길로 새는 얌체족들도 여전하였습니다. 그러잖아도 짜증나는데
저한테 무슨 신통력이라도 있으면 그런 친구들 펑크라도 펑펑 내 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 ‘갓길’을 한때 ‘노견’이라 했던 것 기억하시는지요? ‘노견(路肩)’은 길 어깨라는 뜻인데
영어의 shoulder를 일본에서 그렇게 번역한 것을 우리가 가져다 썼던 거라지요. 그것이 마땅치
않다고 해서 한때 ‘길어깨’라고 직역해 쓰기도 하였는데 어떤가요 ‘노견/길어깨’ 다 거북스럽지요?

그래서 좀더 자연스러운 우리말로 바꾸자고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갓길’입니다. ‘갓길’도
‘길섶’ 같은 걸 추천하며 반대하는 사람이 없지 않았으나 이내 여러 사람의 호응을 얻어서
새말 치고 이만큼 성공한 예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갓길’은 이제 우리에게 친숙한 말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꽃들의 이름이나 그 부분 명칭을 두고도 좀더 쉽고 정감이 가는 말로 바꾸어
부를 수 없느냐는 말씀들을 자주 하시지요. 좀 그랬으면 싶은 명칭들이 정말 많고 많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새말을 만든다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해방 직후 국어 순화(醇化)라고 해서 작업해 놓은 것을 보면 ‘변소’를 버리고 ‘뒷간’을 쓰라고 한 것도
있고, 요즘 순화한 운동 용어 중에는 ‘서브’를 ‘매기기’로 해 놓은 것도 있습니다. 머리를 맞대고
온갖 지혜를 짜서 해 놓은 이런 새말이 두꺼운 책 한 권인데 아무 보람도 없이 사장(死藏)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요. 정말 어렵고 어려운 게 새말 만들기가 아닌가 합니다.

거기에 비해 ‘갓길’ 같은 경우는 드물게 보는 성공 사례라 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갓길’이라는 말만
생각하면 흐뭇한 웃음이 나옵니다. 이럴 수도 있구나! 무슨 희망을 보는 것 같아서일 것입니다.

‘갓길’과 거의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그러면서 역시 성공을 거둔 것으로 ‘둔치’와 ‘가득’이 있습니다.

‘둔치’는 한때 ‘고수부지’라고 하던 것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고수부지(高水敷地)’ 역시 일본 것을
가져다 쓴 것이라는데 유난히 거부감을 주던 말이었던 듯합니다. 그것이 오늘날 ‘둔치’로 정착된
것을 보면 여간 다행스럽지 않습니다.

‘둔치’는 새로 만든 말이 아니고 있던 말을 활용한 경우죠. 즉 전통적으로 쓰던 둔치는 자연적으로 생긴
강가의 언덕인데 이것을 한강 둔치처럼 인공적으로 만든 것을 가리키는 이름에까지 확대해 쓰기로
한 것이죠.

그런데 ‘둔치’는 이미 쓰이고 있던 말이라고는 하나 그때까지 일반인에게 친숙한 말도 아니었고 또 어감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어서 그리 썩 내키는 이름은 아니었는데 의외로 쉽게들 받아들여 오늘날 잘 쓰이고
있는 걸 보면 신통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 팔자만 알 수 없는 것이 아니고  말의 팔자도 알 수 없는가 봅니다.  

‘가득’도 그렇지요. 주유소에 가 기름을 넣을 때 얼마 전 까지는 ‘만땅’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습니까?
‘만땅’도 일본에서 들어온 것이라 하는데 글쎄요 어디서 들어왔든 ‘만땅’은 어딘가 공사판 냄새가
난다고나 할까 좀 들뜬 느낌을 풍기는 듯합니다. 그걸 ‘가득’으로 순화한 것인데 ‘가득’은 물론
‘가득 채우다의 ’가득‘이지요.

‘가득’을 두고는 제게 부끄러운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가득’을 결정하는 일에 참여하고 얼마 안 된
시기였을 텐데 제가 주유소에 가서 “만땅!” 하였더니 글쎄 직원이 “가득요?” 그러는 게 아니겠어요.
아직 ‘가득’이 보급되지 않았을 것 같아 유별나게 ‘가득’이라고 하기가 쑥스러워서 그랬던 것 같은데
직원이 그렇게 한 방 먹인 것입니다.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지금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어떻든
‘가득’도 이처럼 아주 빠르게 잘 정착된 것 같습니다.  

잘 되는 일을 보면 아주 쉽게 되는 것 같은데 안 되는 일은 또 왜 그렇게 힘들게 안 되는지요?
특히 새말 만드는 일은 억지로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말이란 게 함께 써 주어야, 그렇게 해서
살아 움직여야 제 기능을 하는 것이라서 사람들이 받아들여 주지 않으면 생명을 이어갈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오늘 멋지게 성공한 사례를 몇 개 보았습니다. 이런 성공의 좋은 기분을 안고
기름 ‘가득’ 넣고 멋진 피서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제발 ‘갓길’로 다니시지는 말고요. 그리고
멀리 못 가시는 분은 가까운 ‘둔치’에 나가 강바람 쏘이시며 한 여름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입추요 말복이라니 더위 제 놈도 이제 얼마나 더 버티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