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산책

* 노인봉의 우리말 산책(29) - 맨드라미와 민들레

뜰에봄 2007. 9. 17. 19:04

요즘 여기저기에서 맨드라미가 고운 자태를 뽐냅니다. 이놈을 만나면 늘 반갑습니다. 그야말로
누님 같이 생긴 꽃이라 할까 저에게는 언제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그렇게 정이 가는 꽃입니다.
더욱이 요즘 갑자기 허전해져 가는 들판을 이놈들이 밝혀 주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요.

오늘 이 맨드라미를 보다가 문득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떠올랐습니다. 거기에
바로 ‘맨드라미’가 나오지 않습니까?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워낙 유명한 시이므로 이 구절도 낯에 익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의 ‘맨드라미’는 좀 이상한 느낌이
들지 않나요? “맨드라미? 맨드라미? 봄에 맨드라미?” 그런 느낌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맨드라미’는 오랫동안 시빗거리가 되었지요. 봄에 무슨 맨드라미냐고. 제목도 그렇지만
이 시의 배경은 봄이 분명한데 거기에 느닷없이 가을꽃인 맨드라미가 등장하여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거지요. 무슨 작가가 이런 기초적인 식물 이름도 제대로 모를 수 있냐고 이것 때문에 시인이 그야말로
<무식한 놈>이라고 지탄을 받기도 하였지요.

그런데 이 시의 ‘맨드라미’는 사실은 민들레라지 않습니까? 경북 지방에서는 민들레를 ‘맨드라미’나
‘민드래미’라 한다네요. 대구가 고향인 시인이 시에 그 사투리를 썼다는 것입니다.

작품에 사투리를 써도 좋으냐, 쓴다면 어느 선까지 써야 하느냐 하는 것은 그것대로 따로 논의될 문제일
것입니다. 당장 여기의 ‘맨드라미’도 오랫동안 독자들을 괴롭혀 왔지만, 또 바로 뒤따라 나오는 ‘들마꽃’을
두고도 해석이 이것저것으로 갈려 있는 걸 보면 시 작품에 사투리를 쓰는 문제는 두고두고 논란을
불러일으킬 숙제인 게 분명합니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서는 그런 이야기는 접어두고, 한 가지 이름이 전혀 엉뚱한 사물을 가리키기도 한다는
현상에만 주목해 보려 합니다. ‘맨드라미’가 한 곳에서는 진짜 맨드라미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쓰이는데
다른 곳에서는 민들레를 가리키기도 하는 이런 현상이 어떻게 보면 있을 수 없는 일 같으면서도 알고 보면
심심치 않게 있다는 이야기를 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고구마를 ‘감자’라 하는 일일 것입니다. 주로 제주도와 전라남북도에서 그러는데
이 고장에서는 ‘감자’가 감자가 아니라 고구마인 것이지요. ‘무수감자’니 ‘사탕감자’니 아니면 ‘호감자’나
‘양감자’ 등 앞에 뭘 붙여서라도 ‘감자’ 쪽으로 부르는 지역도 꽤 있습니다.

드물지만 강원도 영월에서처럼 철쭉을 ‘진달래’라 하는 일도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외지 사람들이
봄에 ‘진달래’를 따먹은 얘기를 하면 눈이 휘둥그레지지요. 자기들은 진달래를 ‘창꽃(참꽃)’이라 하며 그건 먹어도
‘진달래’는 절대로 못 먹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죠.

철쭉을 ‘함박꽃’이라는 곳도 있습니다. 함경도를 비롯해 강원도 양양이나 강릉 등 제법 많은 곳에서는
‘함박꽃’이 철쭉을 가리키는 이름인 것입니다.
동물 쪽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우리 고향에서는 잠자리를 ‘소금쟁이’라 합니다. 그리고 진짜 소금쟁이는
‘엿장사’라 하고요.

예를 찾으면 꽤 더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볼 때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일으키게 되나요? 대개
부정적이지 않나요? 뭐라고, 고구마를 감자라고? 별 희한한 사람들 다 보겠네, 그런 식으로 말입니다.
풍속에 대해서도 그렇고 말에 대해서도 그렇고 우리는 자기 것과 다른 것을 만나면 일단은 거부감을
일으키게 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번 그렇지님이 올린 <개코같은 소리>도 그런 사건(?)을 다룬 재미있는 촌극(寸劇)이었지요. 식물 탐사 차
영월에 들른 교수팀. 그 교수한테 학생이 물었지요, 이게 무슨 꽃이냐고. 교수는 ‘개미취’라고 대답. 옆에서
그걸 듣던 토박이 할머니 왈 “우째 그게 개미취고? 미역취지.” 교수는 노란 꽃 쪽을 가리키며 “할머니,
미역취는 저게 미역취지요.” 그러자 할머니는 별 개코같은 소리 다 듣겠다고, 노발대발하면서
산을 내려가 버렸다는 게 이 사건의 줄거리였지요.

어떤가요? 자기 세계에 자신감을 가지고 떳떳이 사는 고집불통 할머니가 매력 만점이지요? 모두들
개성 없이 엇비슷하게 닮아 가는 세상에서 이처럼 강인한 개성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우리를
얼마나 신선하게 해 줍니까?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가 다 그 할머니처럼 살 수는 없겠지요. 그렇게 자기 세계가 전부라고
알고 살아서는 안 되지 않겠어요? 할머니는 비싼 돈 들여 대학 갈 것 없이 당신한테 와 배우라고 호통을
치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그 할머니 앞에서 “할머니, 그건 철쭉이고 저게 진달래지요”라고 하면 또 어떤
벼락이 떨어질지 웃음부터 나옵니다.
  
고구마를 ‘감자’라 하는 세상도 있고, 철쭉을 ‘진달래’라 하는 곳도 있고, 민들레를 ‘맨드라미’라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 그걸 위해 우리가 공부라는 걸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더욱이 민들레를
‘민들레’라 하는 사람보고 개코같은 소리 한다고 하는 세상이 되지 않도록 하려고 우리가 학교도
세우고 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꽃을 찾아다니는 일은 또다른 세계를 발견하는 기쁨을 위해서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꽃도
개코같은 꽃은 없다는 것, 그게 늘 설레는 마음으로 길을 나서게 하는 게 아닐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