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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이 써낸 글에 “앞에서 응급한 바와 같이”라는 말이 나와 얼떨떨했던 일이 있습니다. 문맥으로 보아 ‘언급’이라고 해야 할 것을 ‘응급’이라 한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다음 시간에 들어가 그 학생을 불러 세웠습니다. 제 첫 마디는 “자네 고향이 경상도지?”였습니다. 그렇다고 했습니다. 저는 다시 물었습니다. ‘응급’을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 아느냐고.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언급’이 어떻게 ‘응급’으로 둔갑하였을까요? 우선 두 가지 요소가 작용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는 ‘ㅓ’와 ‘ㅡ’의 발음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경상도 분들은 대부분 이 두 소리를 구분하지 못하여 그분들이 발음하는 ‘ㅡ’는 우리가 듣기에는 ‘ㅓ’로 들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같은 과(科)에 음운론(音韻論)이라는 분야를 전공하는 후배가 있는데 이분이 우리 과 신입생에게 과 안내를 하면서 계속 ‘엄운론’이라 하여 우리가 흉내를 내며 웃은 일도 있습니다. 음운론 분야는 바로 그런 것을 다루는 분야로 적어도 그 분야를 전공하는 분은 ‘ㅡ’ 발음 하나는 극복하여야 하는데 그게 그리 쉽지 않은 모양것입니다. 경상도 분들은 실제로 글을 쓸 때도 ‘ㅡ’를 쓸 자리에 ‘ㅓ’를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길을 걸으며”라고 할 것을 “길을 걸어며”라 쓰고, “문을 닫으시오”라 할 것을 “문을 닫어시오”라고 말입니다. 인디카에서도 이런 일을 심심치 않게 봅니다. 어떻든 ‘언급’을 ‘응급’이라고 잘못 안 것은 일차적으로 고향을 잘못(?) 타고난 탓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은’이라고 해야 할 텐데 왜 ‘응’이 되었을까요? 여기에도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감기’라는 말을 하는 걸 잘 들어 보세요. ‘강기’라고 하는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끈기’를 ‘끙기’라 하는 수도 있지요. 뒤에 ‘ㄱ’이 오면 그 영향으로(거기에 동화되어) 앞의 ‘ㅁ’이나 ‘ㄴ’이 ‘ㅇ’으로 소리 나는 버릇이 있지요. 물론 부주의해서이긴 합니다만, ‘은급’이 ‘응급’이 된 것은 이렇게 족보가 있는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언급’을 ‘응급’이라고 쓴 학생은 충분히 용서를 받을 만한 명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아무리 그렇더라도 좀 너무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사실 어처구니없는 일이지요. 모두들 우러러보는 명문대학의 학생이 이런 수준이라고? 그런 생각이 누구나 들지요. 그래서 그걸 오랜 기간 잊지 않고 여기까지 들고 나왔겠지요. 그런데 앞에서 이렇게 되기까지의 두 가지 요소를 밝혀 보았지만 그것은 외형적인 것이고 더 근원적인 문제는 따로 있는 듯합니다. 한자(漢字) 문제입니다. 이 학생이 만일 ‘언급’의 ‘언’이 ‘言’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면 ‘언급’을 ‘응급’으로까지 적는 나락에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이 단어의 한자를 아느냐고 물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지요. 한자는 의외로 유용할 때가 많습니다. 당장 우리 인디카에도 가령 ‘설야’님이나 ‘다향’님을 한글로만 알고 있으면 꽤 막연하다가 ‘雪野’ ‘茶香’을 보는 순간 그 이미지가 훨씬 선명해지지 않습니까? 저는 ‘소원’님의 한자를 나중 보고 그동안 제가 만들어 두었던 이미지가 깨지는 걸 느꼈습니다. 한자가 그걸 모를 때의 막연하던 개념을 선명하게 해 주는 예는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요. 한자를 겉으로 드러내 쓰지 않더라도 어떤 단어가 어떤 한자로 된 말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은 조금도 손해가 될 일이 아닐 것입니다. 가령 “산사에서 시정에 젖어” 이런 글을 보았을 때 머릿속에 ‘山寺’와 ‘詩情’이 떠오르는 사람과 그것이 안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누가 손해겠습니까? “백제 최고의 동검”의 경우 銅劍도 아는 것만큼 이익이겠지만 最古는 더욱이 이 경우 필수적인 지식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응급’이라고 쓴 학생을 두고 앞에서 고향을 잘못 타고났다는 농담을 했습니다만 그 학생은 시(時)를 잘못 타고 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히 그 학생 개인이 책임질 일은 아닐 듯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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