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산책

우리말 산책 (45) ― '쉰다섯'과 '오십다섯'

뜰에봄 2007. 9. 17. 19:26
우리는 뭘 셀 때 ‘하나/둘/셋’으로 세기도 하고 ‘일/이/삼’으로 세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쓰임을 보면 재미있는 구석이 있습니다. 서로 각자의 영역을 나누어 가지는 형국을 보이는 것이
그렇습니다. 가령 체조나 구보를 하면서 구령을 붙일 때는 “하나, 둘 셋, 넷” 쪽을 쓰고
“일, 이, 삼, 사”라고 하지는 않지요? 그러나 축구 스코어는 “삼 대 일” 쪽을 쓰지 “셋 대 하나”라고
하는 일은 없지 않습니까?

이런 영역 구분은 다음 같은 경우에서 특히 흥미 있게 나타납니다. 즉 뒤에 수량을 나타내는 말이 올 때
거기에 따라 한쪽씩을 나누어 가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표는 안 쓰는 표현임을 가리킴).    

(1) ㄱ. 스물여섯 살 / *이십육 살
     ㄴ. 이십육 세(歲) / *스물여섯 세
     ㄷ. 구두 세 켤레 / *구두 삼 켤레
     ㄹ. 사십 리(里) / *마흔 리

앞의 예를 보면 뒤에 오는 단위가 한자어이면 ‘일/이/삼’쪽을 취하고, 그것이 우리 고유어이면
‘하나(한)/둘(두)/셋(세)’쪽을 취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난번에 다루었던 ‘되/말’의 경우
‘한 되/여섯 말’이라 하고 ‘일 되/육 말’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도 같은 원리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늘 규칙적은 아닙니다. ‘근(斤)’이나 ‘냥(兩)’ 같은 것은 오히려 ‘하나/둘(두)/셋(세)’쪽만
취하는가 하면 ‘개(個)’, ‘명(名)’ 같은 것들은 양쪽을 다 취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2) ㄱ. 쇠고기 일곱 근/*쇠고기 칠 근
     ㄴ. 금 다섯 냥/*금 오 냥

(3) ㄱ. 사과 열다섯 개 / 15(십오) 개 국가
     ㄴ. 회원 아홉 명 / 회원 9(구) 명
    

더 흥미로운 것은 시간을 나타내는 ‘시(時)/분(分)/초(秒)’의 경우입니다. 다 한자어인데도 ‘분’과 ‘초’는
한자어 구실을 하는데 ‘시’는 마치 우리 고유어와 같은 버릇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4) ㄱ. 한 시/두 시
     ㄴ. 일 분/이 분
     ㄷ. 일 초/이 초  


더 이상한 경우도 있습니다. 숫자가 낮은 쪽에서는 어느 한쪽만 쓰다가 숫자가 높은 쪽으로 가면
양쪽을 다 쓰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종이를 세는 단위인 ‘장(張)’에서 그 한 예를 볼 수 있습니다.

(5) ㄱ. 백지 세 장/*백지 삼 장  
     ㄴ. 백지 서른 장/백지 삼십 장

어떻게 보면 좀 요지경 같지요? 언어라는 게 꽤 엄격한 규칙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건데 가끔은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는 습관을 만들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깊이 들어가 보면 다 그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은 우리가 무심코 쓰는 말이 참으로 재미있는 구석이 있다는 것만이라도 아는 게 중요할 것 같습니다.
말은 정말 들여다보면 볼수록 재미있는 구석이 많습니다.

이 수사와 관련하여 하나 더 흥미로운 건 제목에 붙인 ‘오십다섯’의 경우입니다. 11에서 99까지의 숫자에도
‘열하나’와 ‘십일’의 두 계열이 있지 않습니까? ‘아흔아홉’과 ‘구십구’도 마찬가지이지요. 이때 고유어는 고유어끼리,
한자어는 한자어끼리 조합을 이룬다는 것은 절대적인 규칙일 것입니다. ‘열일’이나  ‘아흔구’와 같은 조합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십하나’나 ‘구십아홉’과 같은 조합도 규칙에 어긋납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예외가 있는 듯합니다. 보세요. 규칙에 어긋난다는 다음 네 가지를 놓고 보면 다 이상하긴 한데
마지막의 ‘구십아홉’은 그래도 좀 덜 이상한 것 같지 않나요?

(6) ㄱ. *열일
     ㄴ. *아흔구
     ㄷ. *십하나
     ㄹ. *구십아홉

지방에 따라 다릅니다만 ‘구십아홉’과 같은 말은 제법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 아니 지방에 따라서는
‘아흔아홉’보다 오히려 ‘구십아홉’쪽을 더 널리 쓰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흔구’ 같은 것은 정말 이상하게 들리는데
‘구십아홉’은 좀 편하게 들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1978년부터 10개년 계획으로 전국 방언조사를 실시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조사항목으로  ‘예순셋’과 ‘일흔아홉’이
들어 있었는데 그 결과를 보면 경상남도에서는 이들을 철저히 ‘육십셋’과 ‘칠십아홉’으로 말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같은 경상도인데 경상북도는 전혀 아니고 오히려 뚝 건너뛰어 강원도의 영월, 원주, 정선, 평창, 삼척 강릉 쪽에서
(그리고 전북 무주에서) 역시 ‘육십셋’과 ‘칠십아홉’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들 지역에서도 ‘이십셋’이나 ‘삼십아홉’이라고는 말하지 않는
듯합니다. 10단위가 육십, 칠십처럼 높아져야 하는데 이때에도 지역에 따라서, 또는 사람에 따라서는 사십만 되어도
‘사십아홉’으로 말하는 듯하여 그것도 규칙을 세우기 어려워 보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말이란 이렇듯 재미있는 구석이 있습니다. 골치 아프다고 생각하면 골치 아픈 것일 수도 있겠으나
꽃이 단조롭지 않아 우리에게 기쁨을 주듯이 언어도 우리의 예측을 깨는 다양함이 있어 매력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누가 여러분이나 누구의 나이를 “금년에 몇이세요?”라고 물으면
“쉰다섯입니다/오십다섯입니다” 중 어느쪽을 쓸 것 같습니까? 설마 “오십오입니다”라고는 안 하시겠지요.
그 어느것이든 제 나이를 이들 중 하나로 대답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