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년 10월 6일, 음력으로 구월 초 나흗날 아침 나절에 엄마가, 우리 엄마가 돌아 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이런, 이런....세상에~ 아침에 창밖으로 올려다 본 하늘이 청명하고, 햇살도 눈부셔서 온갖 빨랫거리를 들추다가 이불빨래까지 꺼내서 하던 중인데 이런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상중에서 이렇듯 가슴이 철렁 내려앉다 못해 억장이 다 무너지는 소식을 듣기도 하는구나.
엄마께선 지난 5월, 화분에 돋은 잡초를 뽑아 풀섶으로 내 던지시다 허리가 삐끗했는데 그 길로 허리가 계속 아프시다고 하셨다. 병원에 입원해 계시기도 하다가. 오빠네 집에 계시기도 했는데 추석이 지나고 부터는 거동도 자유롭지 못하고, 고통도 심해지고, 입맛도 잃으셔서 미음도 겨우 드시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우리 엄니 올해 85세, 연세도 있으신지라 당신이 가실 날이 얼마 남지 않으신 걸 예감 하셨던지 도회지에 있는 자식집을 마다하고 무조건 고향집에 계시겠다고 고집하시는 바람에 효심이 지극한 두 올케 언니들이 자기집 살림을 뒷전으로 미루고, 고향집에서 어머니를 보살피고 있던 중이었다. ' 매사 사려 깊고 경우를 지키는 우리 엄마셨는데 이젠 체면도 없어지신갑다, 거동도 잘 못 하시면서
병원도 가까운 도시 자식집에 있으면 좀 좋을까?' 엄마를 돌보는 올캐들에게 미안하기도해서 엄마를 대 놓고 나무라기도 했었다.
구월 마지막 주말에 우리 형제들이 고향으로 가서 엄마를 뵈었는데 어찌나 야위고 연약한 모습이던지. 가엽기가 그지 없었다. 엄마를 언제까지 뵐 수 있으려나 조마 조마한 마음에 엄마 모습을 찍으려고 가지고 간 디카를 차마 들이대지도 못하고 말았다. 엄마께선 당신 주위에 둘러 앉은 자식들의 모습을 바라보시며 '맨날 느그 꿈을 꾼다, 어제 밤에는 연수이 니가 젤로 먼저 꿈에 보이더라' 하셨다. 어찌 맨날 자식 꿈을 꿀 수가 있겠나, 자식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못해 정신이 아릿해 지는 순간 순간마다에도 떠 올려지던 자식들 모습이 마치 꿈에서 보는 모습이듯 착각하신 것이리라.
'시월 첫 주에 또 갈게요' 약속을 드려 놓았는데 글쎄 올캐언니로부터 다시 기력을 조금 회복하신 듯 일어나서 쇼파에도 앉아계셨다는 소식에 에라. 다음 주에나 가 보자, 하고 미루고 있던 차였는데.... 왜 다시 한번 뵙지 못할 기회도 안 주시고, 하늘나라로 가 버리시다니 세상에 이런 경우가 어디 있나?
엄마께서 마지막 숨을 몰아 쉬실 즈음에 엄마께서 섬기시던 고향교회 목사님이 오셔서 기도를 해 주시고, 늙으막에 이르러 우리 엄마께서 가장 좋아 하신 찬송 543장을 부르시는 가운데 고요히 소천하셨다고 했다.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 내 주를 따라 올라가 저 높은 곳에 우뚝 서 영원한 복락 누리며 즐거운 노래 부르리~ 내 주여 내 발 붙드사 그 곳에 서게 하옵소서 그 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 옵니다.
내 어머니는 이러한 찬송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저 높은 곳,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고,
기쁘고 참된 평화가 있다는 곳 . 날 빛보다 더 밝은 천국으로 가신 것이다.
우리 엄마가 정말 돌아 가셨나? 엄마를 모셨다는 대구까지 가는 길은 어찌 그리 멀고도 멀던지... 파티마병원 장례식장에 도착해서도 엄마가 이 세상에 안 계시다는 사실이 믿어 지지 않았다. 모든 게 꿈만 같았다. 꽃으로 치장된 울엄마의 사진이 왜 여기 병원 장례식장에 놓여 있을꼬. 참말로 우리 엄마가, 죽었단다.
엄마가, 우리엄마가 죽어서 참 여러사람도 불러 모은다. 슬하의 모든 자손들이며 그 자손들이 인연을 맺은 이들을 다 불러 들이시고 있었다. 사람 좋아하는 우리 엄마, 살아 생전 당신을 보러 이 여러 사람이 왔으면 얼마나 좋아 하셨을텐데....
명주 옷으로 곱게 갈아 입으시는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 보았다. 몸은 비록 차갑게 식어 있었지만 이제껏 보지 못한 평화로움과 편안함이 깃든 모습어서
'아, 이제 정말로 편하신 게로구나' 싶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엄마의 운구를 실은 버스가 대구를 벗어 나 고향으로 가는 길가엔 코스모스도 이쁘고, 익어 가는 감도
꽃처럼 이쁘고, 곱게 물든 페라칸사스 열매도 눈에 띄였다. 우리 엄마 살아 계셨으면 필시 저 예쁜 것들을 보시느라 차창에서 눈을 떼지 못하셨을텐데....
나무관속에 갇혀 계시다니~ 정말 말도 안 돼. 싶은 생각에 불쑥 불쑥 울화가 치밀리기도 했다.
엄마께서 다니시던 고향 교회에 닿았다. 우리 엄마가 앉아 계셔야 할 자리에 우리 엄마 영정 사진이 놓인채로 마흔 한 명이나 되는 엄마 슬하의
자손들이 추모 예배를 드렸다. 교회에서 박순기 권사님으로 불리시던 우리 엄마였는데... 살아 생전 이 자손들이 이 교회에 모여 엄마와 함께 예배를 드렸다면 우리 엄마 얼마나 우쭐 힘이 나고 자량스러우셨으랴. 이 교회에서 엎드려 자식들을 위해 드린 우리 엄마의 기도는 얼마만한 분량일까? 작고 연약한 여인이 반백년도 넘게 드나들며 자식들을 위해 드린 간곡한 기도의 힘을 어찌 측량이나 수 있으리.
교회에서 집으로 이르는 길, 우리 엄마 발자국 자국 안 닿은 곳이 없을 길을 지나 고향집에 들렀다. 늘 하던대로 삽짝 밖에서 부터 엄마아~ 하고 불렀다. 대답이 없다. 미리 기별을 안 했어도 그렇지, 엄마는 마루에도 없고, 방에도 없었다. 집 뒤란 텃밭에서 지심을 뽑고 계시는가? ' 엄마, 엄마'다시 불러 봐도 대답이 없었다. '아이구, 느그들 왔냐? ' 반색을 하고 달려 나오셔야 마땅할 우리 엄마가 왜 안 계시누. 어이가 없고 황당해서 마당에 퍼질러 앉아 서너살 적 아이로 돌아가 으앙 으앙 울어 봐도,
좀 더 큰 아이로 돌아가 엉엉 울어봐도 엄마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 둘도 아닌 자식들 모두가 한결같이 서럽게 울부짖는데, 화계댁 자녀들이 왔다고 동네 소문이 나도
벌써 났겠건만 놀러 나가 계셨어도 그렇지, 지금쯤은 달려 오셔서 ' 내 자식들이 왔구나, 야아들이
와 우노? 엄마가 왔다.인쟈 울음 뚝 그치거래이' 어르고 달래며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닦아 줘야 마땅할
우리 엄마가 없다. 야속하신 엄마, 우째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요. 엄마가 평소에 가꾸고 바라보며 위안을 삼던 마당의 꽃들만 무심히 고울 따름이었다.
우리 엄마 꽃상여에 실려 선산으로 가는 길섶에도 참 여러가지 꽃들이 피어 있었다. 물봉선, 고마리, 여뀌, 씀바귀, 산국, 구절초, 쑥부쟁이, 잔대.... 우리 엄마가 살아 이 길을 지나신다면 꽃사랑이 참 유별나기도한 엄마는 필시 저 이쁜 꽃들에게 눈길을 주시며 '야야, 이 꽃좀 봐라, 이 꽃도 좀 봐라' 하시느라 뒤쳐지셨을 터인데 꼼짝없이 꽃상여에 실리어 성큼 성큼 다 지나치시고 마네.
엄마를 땅에 묻고도 이 미욱한 인간은 밥도 먹고, 떡도 먹고, 물도 마시게 되더라. '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요단강 건너가 만나겠다는 찬송을 했는데, 꼭 그러마고 울면서 약속을 드렸는데 우리 엄마 다시 만날
며칠 후는 얼마나 많은 며칠 후 일까? 요단강은 쉽게 찾아 갈 수 있을랑가?
나는 이제 엄마가 없다. '엄마! ' 하고 부르며 ' 응 ' 하고 대답 해 줄 사람이 천지간에 없다. 이렇듯 '엄마' 라는 말만 일컬어도 서럽고, 외롭고, 회한이 사무칠 날이 올 줄을 몰랐다.
내가 결혼을 하고서 엄마 곁을 떠나 올 적엔 딸내미를 떠나 보내고 서운 해 할 엄마 생각은 아랑곳 않고, 차곡히 쟁여 놓았던 혼수짐이며, 키우던 화분도 오십여개나 골라 싣고 왔다. 우리 엄마, 내가 떠난 뒤에 이방에 가 봐도 저 방에 가 봐도 이 딸년이 떠나 간 자리가 너무나 휑하니
허전해서 곧바로 정신을 놓을 것만 같더라고 했다. 생각다 못해 멀리 계신 이모님께 기별해서 택시라도 타고 당장 와 달라고 하셔서는 하룻밤을 지냈는데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그 길로 나를 보러 서울까지 올라 오셨다. 마음이 급하고 호들갑 스런 성품도 아닌 엄마께서 그렇게 까지 하셨을 땐 이 막내딸을 곁에서 떠나 보낸 서운함이 얼마나 크셨으면 그랬을까 , 엄마가 내게 보여 주신 그 한량없는 그리움에 비하면 나는 기실 얼마만큼 간절하게 엄마를
그리워 했더냐, 싶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니 죄송하고 , 후회되는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좀 더 곰살맞고 다정하게 대해 드릴 걸. 보리문디 가시나 특유의 머쓱함으로 인해 어머니 몸에 부비댄 기억도 한번 없다. 어찌된 인간이 돌이킬 수 없는 지금에 이르러서야 회한에 사무치는가? '있을 때 잘해' 라는 유행가 가사도 있던데... 그런 흔한 진리조차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이라니....
앞으로 내게 남은 세월동안 우리 엄마 보고 싶을 때 나는 어찌하면 좋을까? 지금껏 엄마가 챙겨 주시던 간장, 된장, 꼬신 참기름은 이제 어디에서 얻어 먹나? 암만 병들고 늙어도 엄마는 엄마로 언제까지 살아 계실 줄만 알았다. 엄마가 없는 나는 갑자기 길이라도 잃어 버린 양 나는 그저 막막하고 슬프다. 엄마없는 사람에게도 세월은 약이 되어 줄까? 바르고 착하게 살다 가신 우리 엄마, 이제는 이 세상 걱정 근심 다 잊어버리고
아름다운 저 천국에서 영원한 복락 누리며 사시리란 믿음을 위로로 삼을 따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