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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랑이 머무는 뜰
[24] 어느스토커의 고백-부러진 돛이 다시 오르다.
뜰에봄
2010. 4. 4. 10:35
[24] 어느스토커의 고백-부러진 돛이 다시 오르다.
옛사랑이 오열했을 때 그녀는 영문도 모르고 따라 울었다. 옛사랑이 계속 흐느끼기만 하자 그녀는 무엇인가 찔리는 구석이 있었는지 “제가 잘못 했어요”라고 했다. 그녀의 마음속에도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숨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난 회의 글은 질주 때 느꼈던 그녀와의 만남에 대한 묘한 거부감, 그리고 핸드폰을 받았을 때의 근원을 알 수 없었던 눈물을 이 시점에서 증폭하여 묘사해 본 것이다.
옛사랑이 고난의 질주를 통해 잠시 부딪혔던 윤리적 저항이 있었다고 해서 그녀에 대한 스토킹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옛사랑은 질주를 멈추지 못했던 것처럼 스토킹도 멈추지 못했다. 그러나 절호의 기회에서 그녀를 놓쳤던 충격으로 인해 옛사랑은 그런 식의 추적을 통해서는 그녀를 만날 수 없다고 자포자기했다. 그때부터의 스토킹은 반드시 그녀를 만나겠다는 의도보다는 마치 유적답사처럼 그녀가 사는 곳에 대한 순회라는 성격이 강했다.
운명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우리 인생은 의도되고 기획된 일상에서보다 의외적이고 우발적인 사건에 의해 그 행로가 바뀌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러한 의외적이고 우발적 사건도 우리가 일관성을 가지고 어떤 목적을 추진할 때 찾아온 다는 것이다. 목적에 이르는길은 우리의 기획과 의도대로는 되진 않지만 꾸준히 추구하면 예상치 못한 곳에서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불쑥 기회를 내민다.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그녀에 대한 절호의 추적 기회는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옛사랑이 그녀가 사는 곳에서 막연한 행보를 계속하며 지쳐 있을 때, 그는 그녀의 모든 정보를 기록한 연두색 노트(18편 4번째 절 참조)를 기억해 내었다. 학자나 연구자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연구의 난관에 부딪혔을 때 우리는 새로운 이론을 개발하거나 학습하기보다는 원론으로 돌아가야 한다. 원론으로 돌아가라!”
옛사랑은 새로운 지역에 대한 정탐 대신에 그녀에 대한 추적의 “원론”인 연두색 노트를 꺼내 들었다. 정보를 찾아내겠다는 의도보다는 회상의 일기장을 대하는 기분으로 그 노트를 다시 읽어 보았다. 처음부터 읽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읽다 보니 22번 항목에서 “그녀는 일요일 아침이면 아들을 데리고 간혹 동네 일식집에서 초밥을 먹기도 함”이라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옛사랑의 눈이 무심히 다음 항목으로 넘어가려는 순간, 옛사랑은 그 항목을 다시 주시했다. 그 항목에서 무엇인가 새로운 단서를 포착한 것이 아니라 왠지 정보가 좀 불완전하게 적혀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언젠가 대화창에서 분명 이 일식집의 이름을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일식집 이름이 적혀 있질 않았다.
그 이름이 뭐 였더라... 그 이름이 뭐였지.... 옛사랑은 그 이름을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그 이름을 기억해서 큰 단서가 되리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정보를 기록할 바에는 제대로 기록해 두어야 한다는 단순한 의도였다. 옛사랑은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당시 들을 때는 아주 친숙한 일본 지명이었는데..오사카였던가 교오토 였던가. 동경?, 북해도 였나? 가물가물 하면서도 선뜻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일단 옛사랑이 자기가 일식집 주인이 되었다면 쓰지 않았을 법한 일본식 지명을 빼고 압축한 지명은 네 가지 정도였다. 오사카, 나고야, 동경, 북해도,.. 이 지명 외에는 도무지 짚이는 이름이 없었다.
옛사랑은 한 가지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다. 114에 전화해서 그냥 한번 확인해 보는 것이다. 옛사랑은 114에 전화했다. 혹시 S동에 오사카, 나고야....이런 이름 가진 일식집이 있나요 하기가 이상해서 한 가지 씩 묻고 없다고 하면 끊고 하는 방법을 택했다. 오사카, 나고야 라는 일식집은 그 동네에 없었다. 동경을 물었을 때 안내원은 있다고 했다. 전화번호를 적어두었다. 북해도는 없었다. 오직 동경이란 이름의 일식집이 그 동네에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동경이라고 말한 것 같기도 했다. 옛사랑은 노트를 꺼내 22번 정보란에 “동경(?)”, 이렇게 써서 첨가해 두었다.
그때 또 옛사랑의 눈이 가늘어 졌다.
옛사랑은 천천히 핸드폰으로 손을 가져갔다. 전화안내원이 가르쳐준 그 전화번호를 뿅뿅 누르기 시작했다. “네..동경임미드”라는 응답이 들렸다. 의의로 그 목소리는 털털한 경상도 목소리였다. 옛사랑은 상대에게 친근감을 주기 위해 능숙한 경상도말로 그 곳에 찾아 가려는 데 위치가 어디냐고 물었다. 상대도 서툰 표준어를 안 써도 되는 안도감에서였던지 더욱 능숙한 경상도말로 대응해 왔다. “M백화점 알지예. 광장에서 N역 방향으로 건널목 건너면 쪼깨난 골목이 바로 있슴미드. 그 길 따라 쭉 200메타 오시면 도중에 골목사거리가 두개 나옴미드. 그 두 번째 골목 사거리 오른 편에 우리 가게가 있슴미드. 옛사랑은 더욱 눈을 가늘게 떴다. 거기 일요일이면 간혹 중학생 데리고 오는 아주머니 오는 집 맞냐고 물었다. ”아..** 엄니말이지예. 네..요즘은 잘 안오시데예. 근데 와그람미끄?“
그 순간 옛사랑은 핸드폰을 끊었다. 연두색 수첩의 10번 난에 “그녀는 아들**이를 데리러 늘 자정쯤 S동 사거리에 간다”라고 적혀있었다. 그 일식집 주인이 말한 아들 이름과 그 수첩의 이름은 완전히 일치했다. 그녀는 그 일식집에 아들과 같이 초밥을 먹어러 갔던 것이다. 옛사랑은 중요한 단서를 찾아낸 것이었다.
옛사랑의 가슴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 때 질주의 전동차에 올렸던 그 돛. 그 24분간 옛사랑의 마음에 펼쳐졌던 그 커다란 돛이 다시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 최초의 항해에서 파우스트와 지킬 박사가 망가뜨렸던 그 돛단배의 돛과 조타실과 선체를 하이드와 메피스토펠레스가 부지런히 수리했다.
전동차에서 읇조렸던 그 조잡한 자작 뱃노래를 다시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어서가자..어서..
이번에는 아주 어야라 디여 후렴까지 붙었다.
옛사랑은 추적의 돛단배를 다시 바다에 띄웠다.
부러졌던 돛이 다시 오른 것이다.
(note)
고이비토요(戀人よ) -吳輪眞弓(이츠와 마유미)
枯葉散る夕暮れは(카레하치루유우구레와)
낙엽이 떨어지는 이 석양은
來る日の寒さをものがたり(쿠루히노사무사오모노가타리)
이제 곧 다가올 겨울을 이야기하네.
雨に壞れたベンチには(아메니코와레타벤치니와)
비 맞아 낡아 버린 이 벤치에는
愛をささやく歌もない(아이오사사야쿠우타모나이)
우리 사랑을 속삭였던 노래마저 사라졌네.
戀人よ そばにいて(코이비토요 소바니이테)
내 사랑아 내곁을 떠나지 마세요.
こごえる私のそばにいてよ(코고에루와타시노소바니이테요)
외로움에 떨고 있는 내 곁에 있어주세요.
そしてひとこと この別れ話が(소시테히토코토 코노와카레바나시가)
冗談だよと 笑ってほしい(죠당다요토 와랏테호시이)
그리고 웃으며 한마디만 말해주세요. 제게하신 안녕이란 말은 진정 농담이었다고
砂利路を驅け足で(자리미치오카케아시데)
자갈길을 뛰어가는
マラソン人が行き過ぎる(마라손히토가유키스기루)
마라톤선수가 내곁을 스치네
まるで忘却のぞむように(마루데보오캬쿠노조무요오니)
마치 우리사랑 까많게 잊기 원하듯
止まる私を 誘っている(토마루와타시오 사솟테이루)
망연하게 서 있는 나를 부르네
戀人よ さようなら(코이비토요 사요나라)
내 사랑아 이제는 안녕
季節はめぐってくるけど(키세츠와메굿테쿠루케도)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あの日の二人 宵の流れ星(아노히노후타리 요이노나가레보시)
그 날의 우리 두 사람 나누었던 그 사랑은 마치 별똥별처럼
光っては消える 無情の夢よ(히캇테와키에루 무죠오노유메요)
반짝였다가 꺼져버린 무정한 꿈이여
戀人よ そばにいて(코이비토요 소바니이테)
내 사랑아 내 곁에 있어요
こごえる私のそばにいてよ(코고에루와타시노소바니이테요)
제발 외로움에 떨고 있는 나의 곁에 있어주세요.
そしてひとこと この別れ話が(소시테히토코토 코노와카레바나시가)
冗談だよと 笑ってほしい(죠당다요토 와랏테호시이
그리고 웃으며 한마디만 말해주세요 제게 하신 안녕이란 말은 진정 농담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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