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딱딱한 우리말 산책 대신 향기 그윽한 수필 한 편을 소개합니다.
제가 앞으로 <좋은 글을 찾아서>라는 책을 내게 되면 실으려고 뽑아 둔 것으로
제가 존경하는 분의 글입니다.
마침 이 글의 마무리가 "MERRY CHRISTMAS! A HAPPY NEW YEAR!” 이네요. 제 인사도
거기에 실어 보냅니다.) ㅡ 노인봉
(경고: 뜰에봄님은 이 글에 댓글이 10개가 붙기 전에는 댓글을 달지 마옵소서.)
한 10년쯤 되었을까. 12월 하순 성탄절에 가까운 어느 날이었다. 나는 어느 망년회에
참석하기 위해 다섯 시 경에 집을 나섰다. 이미 날은 어둑하였고, 함박눈이 탐스럽게
내리고 있었다. 관철동에 있는 어떤 한옥 술집은 망년회를 하는 패거리들로 인해 방마다
초만원이었다. 부엌에서는 아낙네들이 순두부니, 파전이니, 조개탕이니 하는 안주들을
장만해서 특주 막걸리 주전자와 함께 상을 차리느라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 모임에 참석한 친구들도 이웃 방 패거리들에게 질세라 호기 있게 떠들고 있었다.
더러는 해마다 연말이면 으레 느끼곤 하는 허전함과 아쉬움을 달래지 못해 공연히 목소리만
높였는가 하면, 또 더러는 망년회장을 찾아오는 길에 만난 함박눈에 그만 소녀처럼
센티멘털해진 나머지 턱없이 수다를 떨고 있었다. 이래저래 우리들은 그 특주 막걸리라는 것을
여러 주전자 비웠고 모두들 거나한 기분이 되었다. 지난 이야기들이 무수히 들추어졌고,
이미 잘 알려진 일화 및 경험담들이 새삼스럽게 등장하자 누구나 과장된 폭소 혹은
분노를 터뜨리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누군가가 이제 자리를 떠야 할 시간이 되었다고 했을 때는 이미 통행금지 시간에 가까운
늦은 시간이었다. 마루를 거쳐 마당으로 통하는 디딤돌 위에는 우리 일행의 구두만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모두들 자기 신을 찾아 신은 후까지도 나는 내 구두를 한 짝
찾지 못하고 있었다. 구두가 분명히 두 짝밖에 남아 있지 않은데 서로 짝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심부름하는 아이를 시켜 신장을 여러 번 뒤져보게 했지만 없어진 한 짝의 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보다 먼저 자리를 뜬 패거리들 중의 한 사람이 내 신 한 짝을 잘못 신고 가면서 그 대신
자기 신을 한 짝 남겨 놓았음이 분명했다. 이런 때에는 주인이라도 불러서 한바탕 호통을 쳐야
시원할 듯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주인을 탓할 일은 되지 못했다. 그래서 내 신 한 짝을
잘못 신고 간, 그 이름과 얼굴을 모르는 취객에게 욕을 퍼부어 화풀이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얼빠진 자식, 눈은 뒀다 어디에 쓴담. 아무리 취했기로서니 이토록 생김새가 다른 구두를
구별하지 못하다니 그게 되기나 할 말인가. 비록 짝신인 줄을 몰랐기로서니 신어보면
대번에 제 신이 아닌 줄 알았을 것 아닌가. 남의 신을 신고 가려거든 짝이나 맞춰 신을 것이지
이게 무슨 멍청한 짓이람.”
함박눈은 어느새 그쳤고, 골목마다 온통 빙판이었다. 나는 길이 그처럼 미끄러운 이유도
얼어붙은 길바닥이나 내 술기운 때문이 아니고 바로 내가 신고 있는 짝신 탓이라고 생각했다.
미끄러질 뻔한 고비를 여러 번 아슬아슬하게 넘길 때마다 나는 그 얼간이를 저주했다.
“얼빠진 자식, 나를 이토록 속상하게 했으니 네놈이 필경 새해에는 아무 복도 받지 못하리라.”
이튿날 아침에 출근을 하기 위해서 신장을 열어보니 세 켤레의 구두가 뒤죽박죽 놓여 있었다.
모두 다 끄집어 낸 후에 짝을 맞추어보니, 이건 또 웬 조화람. 세 켤레가 모두 짝이 맞았고
어제 내가 신고 온 그 짝신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동안 나는 도깨비에게 홀린 기분이었으나
이내 머리 속에서 무엇인가가 번쩍했다. 그 술집에서 짝신을 신으면서 느꼈던 그 편안한 착용감이
문득 떠올랐던 것이다. 망년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집을 나설 때부터 구두 짝을 잘못 맞춰
신고 나간 것이 아닌가. 한쪽 구두는 코가 뾰쪽한 데 비해 나머지 한 쪽은 코가 둥근 것이니
아주 달라 보였는데도 나는 멍청하게 그 짝신을 신고 집을 나섰던 것이다. 술집을 나설 때도
짝신에만 너무 정신이 팔린 나머지 두 짝이 모두 내 구두라는 사실을 미처 보지 못했고,
그 편안한 착용감에도 불구하고 구두를 조심스럽게 살펴볼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색상이나 무늬가 비슷한 양말을 짝이 맞지 않게 신고 외출했던 일이 여러 번 있다. 그러나
짝이 맞지 않는 구두를 신고 외출한 적은 한번도 없기 때문에 ― 적어도 내 눈에 띈 적은 없었지만,
이제 그걸 어떻게 장담하랴 ― 이번 일을 생각하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더욱이
내 구두를 한 짝 신고 갔다고 여긴 그 ‘얼간이’에게 험구를 함으로써 실은 내 자신을 욕하게
된 셈이라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이번 경우에는 어차피 있지도 않은 사람을 두고 비난을
한 것이니 기껏해야 누어서 침 뱉기 식의 어리석음을 범한 꼴이지만, 실생활에서 실존인물을
놓고 이런 터무니없는 곡해를 했을 경우가 얼마나 많았을까 생각하니 순간적으로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나는 간밤에 그 얼간이에게 퍼부었던 욕지거리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왜 그 얼굴도 모르는
취객에게 좀 너그럽게 대해 줄 수 없었을까?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덕담을 베풀 수도
있었을 것이 아닌가? “여보게, 취객, 그대는 술이 무던히도 취했던 모양이오. 아무리 발에
꼭 맞는 신발이었기로서니 이렇게 생김새가 다르지 않소. 하지만 어쩌겠소. 그대가 내 구두
한 짝을 잘못 신고 갔기 때문에 나는 구두 한 켤레를 잃은 셈이지만, 한편 생각하면
그리 섭섭하게만 여길 일도 아닌 것 같소. 그대 덕분에 나는 새 구두를 한 켤레 사서 신을
구실이 생겼고, 그대 또한 필경 새 구두를 사서 신게 될 것 아니오? 이렇게 우리 모두 새 신을
신게 되어 즐거울 테고 구두장수는 구두를 두 켤레씩이나 더 팔게 되어 즐거울 테고….
그러니 그대가 비록 조금 얼이 빠진 사람이기는 하나, 내 축복을 받으시라.
"MERRY CHRISTMAS! A HAPPY NEW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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