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마살

간이역, 그리움 따라

뜰에봄 2008. 8. 21. 07:43

가을날의 수채화
간이역, 그리움 따라
경남도민일보 기자  

▲ 화물역으로 바뀔 낙동강역에는 앞으로 사람들이 내릴
수 있는 햇수가 5년 남짓이다.
ⓒ 경남도민일보 김구연 기자
‘파아란 하늘에 두둥실 흘러가는 구름, 그 아래 살랑거리는 주황색 코스모스 이파리, 그리고 그 옆의 간이역 대기실’

거기다 덜커덩거리며 천천히 속도를 줄이는 통근열차가 역 쪽으로 서서히 다가온다면…. 이만한 가을날의 수채화가 또 있을까.

하면 올까 하면 올까, 기다리고 또 기다리지만 기차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기차가 없는 철길이나 사람이 없는 역이나 신세는 같다. 하지만 계절이 바뀌고, 날씨가 변덕을 부려도 마치 자연의 일부처럼 간이역은 생긴 그대로 덩그러니 놓여있다. 가을날 자연의 조화는 역이나 철길에 더욱 그럴듯하게 어울린다. 경남을 가로지르는 경전선의 간이역에서 자연보다 더한 자연이 돼버린 인공물을 보게 된다. 옛 역사가 사라져버린 간이역에는 버스정류소 만한 대기실과 가로등, 예나 지금이나 똑 같은 하얀 바탕에 검은 글씨의 역명 간판이 그대로 남아있다.

유치원 아이들 야외수업 나갔던 낙동강역
간이역 가을 여행을 경전선 동쪽에서 서쪽으로 하기로 한다. 방법은 둘, 직접 기차를 타거나 간이역을 따라 차를 몰아가는 것이다. 기차를 타려면 대부분 간이역에서 정차하는 무궁화호나 통근차를 타야 하는데, 횟수가 드문 것이 탈이다. 반면 두 곳 정도로 방문할 간이역을 줄인다면 충분히 시간을 맞출 수 있다. 한참이나 기다려야 할 시간동안 소풍을 가고, 군것질을 하면 된다.

경전선 동쪽에서 가장 먼저 방문한 간이역이 밀양 삼랑진역과 한림정역 사이 낙동강역이었다. 낙동강의 엄청난 강폭을 이어주는 철교 사이로 기차가 지나가면 곧바로 만나게 되는 역이다. 유치원 시절, 비둘기호를 타고 이 역에서 내려 강변 백사장에서 신나게 놀았던 기억을 누군가 갖고 있는 곳이다.

간이역답지 않게 아직 남아있는 역사에는 역무원 한 사람이 근무를 하고 있다. 그는 기차 시간을 체크하거나 표를 팔기도 하고, 밖으로 나와 철로에 기름칠을 하거나 풀을 뽑는다. 요즘도 유치원 아이들이 많이 오는지 물었더니 그는 더 많은 답을 해주었다. “강변에 농토가 늘고 공사가 계속 되면서 백사장이 거의 없어졌어요. 그래서 전보다 많이 안 오지요. 거기다가 한 5년 뒤에는 이 역이 화물만 다루는 역으로 바뀌어요. 주변에 화물 보관할 터를 닦고 있지요.”

5년이나 남았다니 아직 늦지 않은 셈이다. 밀양 방향 상행선이 하루 네 번, 마산·진주 방향 하행선도 하루 네 번 낙동강역에서 선다. 

▲ 함안 원북역에는 주변 고택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 경남도민일보 김구연 기자
 
문득 그리운 함안 산인역
마산~함안 옛 국도를 따라가면 입곡저수지 입구에서 산인역을 찾을 수 있다. 이 역에 와서야 비로소 간이역의 3요소를 실감한다. 대기실과 가로등, 역명간판이 그것이다. 사람 없는 대기실에 앉아 망연히 철길을 바라보면 그 길이 아름답다는 것을 안다. 공백과 그리움, 여운 같은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대기실 창문 틈으로 비치는 자연은 마치 화폭 같다. 그림을 제대로 보지 못하지만 ‘모름지기 그림은 저래야 안 되나’ 싶다. 마침 기차의 거대한 몸집이 대기실 창문 틈으로 들어왔다. 생동하는 그림이 영화관의 스크린을 연상하게 했다. 이 기차는 산인역에서 양 방향 각각 세 번씩 선다는 통근차나 무궁화호가 아닌지 굉음을 울리며 지나갔다.

이 역은 가까이 입곡저수지 가는 낚시꾼이나 관광객들이 자주 이용한다. 차를 버리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이다. 역 근처에는 ‘문득 그리움’처럼 간이역에 상호를 맞춘 식당이 몇 곳 있다. 비빔밥의 이름도 ‘그리움밥’이었다.

▲ 작은 글씨로 된 지명이 경전선의 간이역들.
ⓒ 경남도민일보

주변의 고택과 어우러진 원북역
누군가 인터넷에 ‘원북역에 한번이라도 발길을 딛는 사람은 반드시 플랫폼을 거닐고, 주위의 풍경에 빠져들게 된다’고 썼다. 그 짧은 글의 매력에 끌려 산인-가야읍-군북 국도를 따라 원북역으로 갔다. 간이역을 따라가는 국도와 지방도 여행의 맛이 새로웠다. 그런데 근처에 닿았을 때에는 역 찾는 일을 잊게 할 뭔가가 있었다.

역 주변의 고택에 그만 눈길을 빼앗긴 것이다. 철길과 도랑, 고택의 후문이 숲 속에 절묘하게 감춰졌다. 정문 주소 판을 보니 ‘조씨 문중’이라는 표시가 있고, 그 옆엔 500년 묵은 은행나무를 ‘보호수’로 안내한 간판이 더욱 컸다. ‘재실’로 짐작된 고택 안에는 본채와 바깥채가 연못으로 구분되고, 벼랑을 깎아 만든 계단으로 정자가 연결됐다. 정자에서는 또 근처의 ‘서산서원’이 훤하게 내려다보였다. 이러다가 간이역 찾을 생각도 나지 않겠다.

원북역은 고택 앞 철길을 따라 200m 정도를 걸으면 나타난다. 이제 곧 황금색으로 바뀔 들녘은 향기마저 푸르고, 철길 옆 느티나무 행렬은 싱그럽기 그지없다. 간이역 옆에 피어있는 코스모스 옆으로 마치 꽃잎처럼 승차권이 떨어져 있다. ‘함안-원북 자유권, 1400원’ 이곳 역시 통근열차와 무궁화호 상·하행선이 각각 하루에 다섯 번 씩 선다.

▲ 하동 양보에서 고향역과 만난다.
ⓒ 경남도민일보 김구연 기자

그리운 고향역 양보역
간이역 드라이브로 중부 경남을 훌쩍 벗어났다. 마치 ‘강원도의 산 속 역’을 연상하게 한다는 하동 양보역을 찾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 길을 찾기 어려웠다. 남해고속도로 곤양 IC에서 빠졌더니 이런저런 지방도를 어렵게 탄 끝에 진주~하동 국도를 합류할 수 있었다. 차라리 진주~하동 국도를 빨리 찾아드는 것이 양보역 가는 지름길이 된다. 북천면에서 황토재를 넘으면 양보면이 나온다.

양보역 가는 길은 황토재 고갯마루에 놓여있다. 과연 강원도의 골짝을 닮은 듯 길은 고갯길을 굽이굽이 돌아 우봉리 하성마을에 접어들었다. 그 마을 안에 거짓말 같이 생긴 역이 하나 있었다. 지리산 자락인 하동군의 횡천역과 북천역 사이의 양보역이 이곳이다.

ⓒ 경남도민일보 김구연 기자

골짝의 들녘에도 벼는 익어 고개를 떨구고 있다. 철길을 따라 주황빛 띠고 있는 코스모스를 보면 노랫가락이 절로 나온다.

‘코스모스~ 피어 있는 정든~ 고향역, 이쁜이 꽃분이 모두 나와 반~겨 주겠지. 달려라~ 고향 열차 설레는 가슴 안고, 눈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운 나의 고향역~(빵빵)’

글= 경남도민일보 이일균 기자 iglee2@domi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