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의 동쪽 성산에서 시작해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이어지는 올레길.
제주 방언으로 골목길이라는 뜻의 올레가 언제부턴가 유명세를 탄다 싶더니 기어이 나도 그 길에 서게 되었다.
24년동안 룸메이트를 유지하고 있는 남편과, 사이버에서 얻은 친구 '뜰에봄'과 함께.
올레길은 전체 13구간으로, 놀멍 쉬멍 5~6시간씩 걸을 수 있는 거리로 나누어져 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루. 그 한정된 시간에 어느 코스로 가야 가장 멋있을지 2주전부터 행복한 고민이었다.
올레길의 시작인 1코스로 갈 것이냐, 신비로운 원시림의 11코스로 갈 것이냐를 두고 갈등하고 있는데
친구가 최후로 낙점한 곳은 엉뚱하게도 7코스! 올레길 다녀온 사람들이 가장 많이 추천하는 코스라나?
외돌개(윗사진) 앞 바다에 뜬 범섬은 올레길을 걷은 우리를 하루종일 따라왔다.
어느 곳에서는 엎드린 낙타였다가 어느 곳에서는 강아지로 변했다가...
서귀포 중문 쪽은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고, 나 역시 몇 번은 와본 곳이라 사실 신선미는 없었다.
카렌다에 단골로 등장하는 낯익은 풍경, 걷기 좋은 산책로와 편의시설. 이런 것들이 외지인들의 추천을 많이 받는 모양이지만...
잘 정비된 해안 산책로를 따라 외돌개에서 돔베낭길에 접어들었을 때 긴급상황 발생!
"내 카메라 못 봤어?" 화장실에 다녀온 친구가 다급하게 외친 것이다.
좀 전에 해안가에 내려갔다 왔는데 거기 두고 왔나? 혹시 다른 사람이 가져갔나? 발을 동동 구르다 친구는 왔던 길을 되짚어 가고
돌아오지 않는 그녀가 걱정돼서 남편도 뒤따라 가고... 혼자 퍼질러 앉아 배낭을 지켰다.
30분만에 돌아온 카메라가 주인에게 혹시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프로이드에 의하면 어떤 물건을 잃어버리는 것은 새 것을 갖고 싶다는 심리랍니다. 주인님, 혹시 새 카메라가 필요하세요?
돔베낭길 야자수 숲을 지나며... 푸른 하늘이 아쉬웠던...
친구가 카메라를 잃어버린 곳. 이름하여 '뜰에봄해안'... 물론 내가 명명했다 ^^*
(넋을 놓고도 남을만하지 않은가?)
속골 해안. 올레길을 가리키는 리번이 장대 위에서 펄럭인다.
돌담 위에, 나뭇가지에, 길 바닥에 표시된 올레길은 파랑과 노랑의 시그널이다.
파란색은 바다를, 노란색은 제주 특산물 귤을 상징하는데 자칫 딴전을 피우다 보면 시그널을 놓치기 쉽다.
귤 농장도 지나고, 백합 농장도 지나고, 해녀 작업장도 지나고...
올레길은 제주인의 삶 속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길이다.
제주판 모세의 기적이라는 썩은도(서건도)가 눈 앞에 나타났다. 섬 이름이 썩 유쾌하지 않은데는 이유가 있다.
섬의 토질이 죽은 흙이라는 설, 썰물 때 돌고래가 제때 빠져나가지 못해 바위에 갇혀 죽어 그 시체가 썩었다는 설...
해안가 바위를 타고 넘는 길, 절벽 위에 고고하게 살아있는 나무 한 그루가 이채롭다.
평일인데도 올레길을 걷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삼삼오오 무리지어 혹은 혼자서... 생각보다 젊은 사람들이 많았다.
놀고 즐기는 문화에서 보고 느끼는 문화로 여행 패턴이 바뀐 듯하다. 올레길이 여행문화를 바꿔놓은 것일까?
선인장 고목이 꽃을 피웠다. 나도 늙어서 저렇게 꽃 피울 수 있으면 좋겠다! 단 하루 피고 말더라도...
물만 보면 신발 벗고 뛰어든다는 그녀. 온몸으로 뛰어드는 나보다는 약하다, 약해.
나뭇잎 중에 하나는 항상 단풍이 든 채로 있는 담팔수는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식물이다.
초록이 무성한 잎새들 속에 빨간 잎의 단풍 악센트가 이채롭다.
썩은섬을 지나 강정포구로 가고 있다. 범섬이 지치지 않고 우리를 따라온다.
치명적인 독을 품은 유도화. 그러나 꽃은 더없이 아름답다. 팜므파탈의 전형처럼.
잎은 버드나무를, 꽃은 복사꽃을 닮았다 해서 柳桃花, 중국에서는 대나무에 피는 복사꽃이라 해서 夾竹桃라 한다.
한 장의 잎으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저 나무를 외국에서는 고속도로 주변에 심어 야생동물을 막는다고.
바닷길을 돌아가면 조그만 포구... 정답고 소박한 어촌 풍경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돌담 속에 뿌리 내린 네 신세가 기박하구나. 소속이 인간의 삶을 결정하듯이, 너도 뿌리 내린 그곳이 네 운명이 아니겠느냐!
한탄할 것 없다. 눈이 오면 눈을 맞고, 비가 오면 비를 맞고... 천천히 걸어가다 사라지면 그 뿐이다.
순비기꽃의 저 청보라색을 나는 참 좋아한다. 그러나 저 색깔로 된 옷은 내게 단 한벌도 없다.
내가 좋아하는 색깔이 내게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내게 어울리지 않아서 포기한 적이 있다. 아니, 많다.
흐린 하늘에서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진다.
어제도 오늘도 한라산은 구름모자를 눌러쓰고 한번도 얼굴을 들지 않았다.
마누라한테 잡혀서 올레길에 동참한 내 남자. 회사에서는 전화가 바리바리 와쌋는디...
광고해주고 싶을만큼 아름다운 풍림리조트. 멋진 조경에다 숙식비도 저렴해 올레꾼들의 사랑을 받는다고.
풍림리조트 아래 멋드러진 계곡이 카메라를 부른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여기서 마음을 또 빼앗긴다.
제주에는 이런 주상절리가 몇 군데 있다.
해안 절벽 주상절리에 파도가 부딪히는 모습은 장관이지만, 육지의 주상절리도 봐줄만하지 않은가?
문득 법환포구 식당에서 만난 젊은 올레꾼이 생각난다.
하루에 1.5코스씩 닷세째 올레길을 걷고 있는 그는 회사 휴가를 이용해 단신으로 제주도로 날아왔다던가.
"저요? 대단한 거 아니에요. 어떤 여자분은 회사 그만두고 석달동안 방을 얻어 제주도를 샅샅이 둘러보고 있다던데요?"
캬! 부럽다. 팔라우로 간 미스김만큼 용감한 여성이 또 있었네. 자신의 영혼을 위해 안식년을 줄수 있는 그 용기가 부럽다.
분꽃길, 부처꽃길, 으아리길, 칸나길...
제주 해안에는 제철에 핀 꽃들이 목마른 나그네를 위로해주고 있었다.
검은돌 해변을 배경으로 칸나가 있는 풍경.
7코스 올레길 끝, 월평포구에 도착할 무렵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었다.
외돌개에서 월평까지 15.1Km, 너샛시간이면 걷는 길을 6시간이나 걸었다. 그야말로 놀멍 쉬멍 걸으멍.
어느 코스를 몇 시간에 걸었던 게 뭐 그리 중요할까.
함께 걸을 수 있는 길벗이 있어 좋았고,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그 감성이 좋았던 길.
늦사랑도 이루어지면 아름다운 거라고 나는 친구에게 고백한다. 알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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