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카페 '여행, 바람처럼 흐르다' 무심재 여행클럽에 올라 온,
< 探梅, 고결한 선비의 정신을 찾아서 -'옛집에 스민 아름다움' 건축강의 기념답사 > 여행 안내를 보고서
담박에 끌려 신청을 한 결과 4월8일 探梅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선희와 앵두나무님도 동행하게 되어 더욱 행복하고 즐거운 여행 예감 ^^
병산 서원 가는 길, 차창밖으로 내다 보이는 풍경이다. 들판에 있는 갯버들 가지에 봄물이 올랐다.
요즘은 밭도 저런 기계로 일구는 건가? 마알갛게 잘 다듬어진 밭에는 뭘 심어도 잘 될 것 같다.
차창밖으로 계속해서 이어지는 평화로운 풍경에 눈을 뗄 수가 없다. 이렇게 밖으로 나오면 뭐하나 유정하지 않은 것이 없다.
드디어 병산서원 앞에 다다랐다. 병산서원은 2009 년 8월, 베롱나무가 한창 곱게 피던 때에 왔던 곳이다.
지금은 담장밑으로 개나리가 흐드러졌구나.
* 병산서원은 조선중기 서원 정신이 한창 부흥하던 시기에 지어졌다. 소수서원과 도산서원 등 초창기 서원건축 양식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으며, 특히 풍수지리에 입각한 지형에 대한 탁월한 해석과 건물간의 관계를 설정함에 있어 융통성이 돋보인다.
조선의 예학이 딱딱해지기 이전의 건강함을 잘 나타내는 모범적인 서원 양식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때 사진을 올리면서 참고로 올렸던 내용들을 다시 공부하자는 의미로 덧붙여 본다. )
개나리가 핀 오른 쪽 담장아래엔 큰개불알풀이 피어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고맙기도 하지..
뜻밖의 장소에서 기대하지도 않았던 고운 님을 만난 듯, 너무 반가워서 눈물이 다 났다.
내가 꽃을 발견하고서 호들갑을 떠는 모습이 유별나서 선희가 꽃 찍을 생각에 앞서 나부터 찍은 모양이다.
노란 꽃다지도 꽃밭을 이루고 있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작은 꽃송이들이 쫑알거리고 있는 것 처럼 보이는 다정한 풀꽃이다.
이름은 또 얼마나 이쁘냐? 예전에 나는 <꽃다지 >란 닉네임을 쓴 적도 있다.
서원 마당에 들어 서는 순간 마당 양쪽에 있는 매화 나무 두 그루가 눈길을 잡아 당겼다.
예전에 올 때에는 배롱나무 꽃에 홀려 마당에 매화나무가 있는 줄도 몰랐다.
* 본래 이 서원의 전신은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豊岳書堂)으로 고려 때부터 사림의 교육기관이었다. 1572년(선조5)에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이 지금의 병산으로 옮긴 것이다.
1607년 서애가 타계하자 정경세(鄭經世) 등 지방 유림의 공의로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613년(광해군5)에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고 위패를 봉안하였다. 1614년 병산서원으로 개칭하였다.
무심재 선생님께서 오는 도중에 매화가 보기좋게 피었을라나, 염려하셨는데
마침 보기좋게 피어 있어 주어 참으로 다행이다 싶었다.
구부러지고, 옹이 진 가지에 오랜 세월을 견딘 흔적이 역력하다.
다들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저 여인도 표정으로 미루어 멋진 매화 작품사진을 건질 각오가 단단히 되어 있는 듯하다.
작가들이 사진 찍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나도 작가들 흉내를 내어 허공에 매화 가지 걸어놓고 셔터를 꾹 눌러 보았다. ㅎㅎ
앵두나무 여사도 한 가지에 촛점을 맞추는 걸로 보아 작품모드로 들어갔나벼.
* 만대루(晩對樓)
병산서원에서 가장 알려진 건물로서 건축과 조형미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지은 정면 7칸, 측면 2칸의 누각으로 휴식과 강학의 복합공간이다. 팔작기와집에 홑처마로 된 이 웅장한 건물은 인공적인 서원건축과 자연사이의 매개체 역할을 하는데 한국 서원건축의 백미로 꼽힌다. 기둥사이로 보이는 낙동강과 병산은 마치 7폭 병풍을 보는 듯한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한다. ‘만대’는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 '백제성루(白帝城樓)'의 한 구절인 '취병의만대 백곡회심유(翠屛宜晩對 白谷會深遊)'에서 따온 말이다.
- ‘푸른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수는 늦을 녘 마주 대할만 하고, 흰 바위 골짜기는 여럿 모여 그윽히 즐기기 좋구나’. 병산서원을 대표하는 매우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만대루에서 바라 보이는 병산과 낙동강물이 유유히 흐르는 정경이 압권이다.
* 옛 건축물을 단순히 '건물'이라고 해선 안 된다는 얘기가 무슨 뜻인 지 알겠다.
유홍준교수는 “병산서원은 주변의 경관과 건물이 만대루를 통하여 혼현이 하나가되는 조화와 통일이 구현된 것이니, 이 모든 점을 감안하여 병산서원이 한국 서원 건축의 최고봉이다”라고 예찬하였다. . ‘만대’는 두보의 시 <백제성루>에 ‘푸른 절벽 저녁 무렵 마주하기 좋으니(翠屛宜晩對)’에서 따온 말이라고 한다
만대루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작은 연못 <광영지>, 예전에 왔을 땐 배롱나무 꽃잎이 가득 떠 있었는데
지금은 물이 말간 채로 나무를 품고 있다.
*
광영지(光影池)
만대루와 복례문 사이에 물길을 끌어 들여 만든 '천원지방(天圓地方)' 형태의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지금은 흙으로 메꾸어 놓아 그 형태만을 짐작할 수 있다. '천원지방'은 우리나라 전통 연못의 조성 원리로 조상들의 우주관이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땅을 의미하는 네모진 연못 가운데,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섬'을 두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수심양성(修心養性)을 근본으로 하여 학문에 정진할 수 있도록 배려한' 서원 속의 정원'이다.
집 뒷 곁도 기웃거려 보고...
한 송이 딸랑 피어 있는 민들레에게 반갑다 민들레야!>인사도 하고...
담장도 참 아름답다. 돌이며 기와에 붙은 이끼, 담장에 자리잡은 식물들을 찬찬히 봐 주었다.
배롱나무 둥치가 잘 단련된 근육질의 신체를 상시킨다.
장판각(藏板閣)
책을 인쇄할 때 쓰이는 목판(冊版)과 유물을 보관하던 곳으로, 입교당 후면 왼쪽으로 비켜서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도리가 없는 구조이며, 습기를 피하기 위해 정면에 모두 판문(板門)을 달았다. 화마(火魔)를 막기 위해서 다른 건물과 거리를 두어 독립적인 공간을 마련하였다. 서원의 명문도를 평가하는 주요 기준 가운데 하나는 바로 판본의 소장량이다. 따라서 책을 발간하는 목판은 서원의 소중한 재산이었다.
우리 고장에선 저 상사화를 <난초>고 불렀다. 이름이 <상사화>라는 걸 뒤늦게 알았지만 나에게 있어
난초는 저것이 난초다. 예전에 봄은 난초잎이 삐죽이 올라 오는 것으로 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달팽이 뒷간 옆에도 매화꽃이 튀밥처럼 하얗게 피어있었다.
* 달팽이 뒷간
서원 밖 주소(廚所) 앞에 있는 화장실이다. 진흙 돌담의 시작 부분이 끝 부분에 가리도록 둥글게 감아 세워 놓았는데, 그 모양새에서 이름을 따왔다. 출입문을 달아 놓지 않아도 안의 사람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배려한 구조이다. 지붕이 따로 없는 이 하늘 열린 '달팽이 뒷간'은 유생들의 뒷바라지를 하던 일꾼들이 사용하던 것이다. 400여년 전 서원건물과 함께 지어졌으며, 옛 기록에는 대나무로 벽을 둘렀다고도 전해진다. 병산서원의 부속건물에 포함되어 사적 제 206호(1977년)로 지정되었다. 2003년 보수 작업이 이루어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 민들레는 양지쪽에 자리 잡은 탓으로 아까 뒷 뜰에서 만난 민들레에 비해 훨씬 색깔도 선명하고 야무지게 생겼다.
누각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에서 오랜 세월 애쓴 흔적이 느껴진다.
병산서원을 다 둘러 보고 나오는 길...아쉬워서 다시 한번 뒤돌아 보았다.
앵두나무 님도 아쉬운 듯이 돌아보고 카메라를 들이댄다. (뒷 모습이 잼있넹)
몽글몽글 맺혀 있는 명자꽃 망울도 봐 줘야지.
매화에 정신을 파느라 이 사랑스런 꽃망울을 지나칠 뻔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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