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마살

소수서원 , 선비촌

뜰에봄 2011. 8. 8. 00:10

 

 두 언니, 형부들과 휴가여행지를 영주, 예천, 안동지방으로 정해 8월1일 일터 8월3일까지 둘러 보기로 했다.

당초에는 광주로 가서 거문도, 백도로 갈 예정이었으나 언니들의 간곡(?)한 설득에 고마 넘어 가삤다.

 

 

 아침 8시에 출발, 단양휴게소에서 언니들과 만나 제일 먼저 소수서원에 들렀다.

입구에 소나무 숲길이  시원스럽고 길가에 비비추, 참나리, 원추리꽃이 곱게 피었다.

 

 

 

 이 무더운 여름에 이렇듯 멋진 솔숲에 핀 원추리 꽃밭을 볼 수 있음은 참으로 큰 기쁨이요, 행운이다.

그러고보니 지금이 원추리가 가장 예쁘게 필 시기인 것 같다,

몇 년 전 홍도에 가서도 섬기슭에 핀 원추리 때문에 눈호강을 만끽했던 생각이 난다.

 

 

 

이 소나무 군락은 '학자수'로 불리운다고 한다.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꿋꿋한 선비라 되라는 의미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단다.

 

 

 

 

 가지를 안 쳐 주어서인가, 아래에서 부터 무성한 은행나무이다.

500년 세월을 견딘만큼 참으로 의연하고 멋진 모습이다.

 

 

 

 

 

 

경렴정(신재 주세붕 창건)

    서원 담밖, 풍광이 수려한 곳에 위치하여 시연(詩宴)을 베풀고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가꾸던 곳.

 

 

 

 

 

 

경렴정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 풍경.

저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죽계수' 라고 한단다.

 

 

 

 

 

 

백운동 (소수서원의 처음 이름)

 

 

 

 

소수서원은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임금이 이름을 지어 내린 사액서원이자 사학(私學)기관이다. 조선 중종 37년(1542)에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가, 중종 38년(1543)에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백운동서원이라 하였다. 명종 5년(1550)에는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의해 ‘소수서원’이라 사액을 받고 나라의 공인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 중종 39년(1544)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제사지냈고, 인조 11년(1633)에는 주세붕을 더하여 제사지냈다

 

사액서원은 나라로부터 책·토지·노비를 하사받고 면세·면역(免役)의 특권을 가진 서원을 일컫는다. 소수서원은 1871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 조치 때에도 피해를 면한 47서원의 하나. 전국에서 매년 30명 이내를 뽑아 350여년간 4000여명 인재를 배출했다.

 

 

소나무가 서원 안쪽으로 휘어져 자란 모습이 신기하다.

 

 

 

 

 

우리 고향집에 있는 연자멧돌이 생각나서...

 

 

 

 

 

 

 오늘날의 대학 도서관에 해당하는 '장서각(藏書閣)'. 임금이 직접 지어 하사한 서책을 비롯, 3000여 장서를 보관하던 곳으로

'직방재(直方齋)·일신재(日新齋)'의 오른쪽에 위치했는데   "우리나라의 전통적 '좌우지선(座右之先)'의 예를 따라 으뜸 자리에 둔다고 스승의 숙소 우측에 지은 거라고 한다.

 늘 자리 옆에 두어 가르침으로 삼는 다는 뜻의 '좌우명(座右銘)'도  오른쪽에 적어 놓는다 뜻에서 비롯되었다는..

 

 

 

 

 

  원장과 학자들이 기거하던 집무실 겸 숙소 '직방재(直方齋)·일신재(日新齋'

양재(兩齋)가 한 동(棟)으로 이뤄진 독특한 건물이다. 일신재(一新齋)는 일반교수, 원임(院任)들이 쓰던 방으로서 “나날이 새로워지라”는 뜻의 「대학(大學)」에서 딴 것이며 건물우측(右側) 직방재(直方齋)는 원장(백운동주(白雲洞主))이 쓰던 방으로서 안(內(心)) 과 밖(外(行))을 곧고 바르게 하라는 뜻의 「주역(周易)」에서 따온 것이다.

 

 '직방재·일신재' 왼쪽엔 유학생들이 공부하던 기숙사 '학구재(學求齋)'가 있는데, "해질 무렵 스승의 거처가 드리우는 그림자도 피한다는 의미에서 두 칸(12자·약 3.6m) 뒤로 물려 지었고, 방바닥도 스승의 숙소보다 한 자(尺·약 30㎝) 낮추었다"고 한다

 

 

지락제 ㅡ 학문의 즐거움이 이르는 곳이라는 뜻

 

 

 

서원 안에 이런 개울도 있다.

 

 

 

 

 

 

영정각ㅡ회헌 안향을 비롯 회암 주의, 신재 주세붕, 오리 이원익, 한음 이덕형, 미수 허목 다섯 분의 초상을 봉안한 곳.

 

 

 

 

일영대 ㅡ 해시계의 일종

 

 

 

 

 

 

 

 

 

 

 

 

 

선비촌으로 가는 다리

 

 

 

 

 

 

 

 

 

 

 

 

짚으로 바구니며. 짚신 같은 걸 만들어 팔기도 하는데 한쪽에 아주 작은 싸리종다래끼도 하나 보이길래 15,000원 주고 얼른 샀다.

 

 

 

 

 

 

 

 

 

 

 

 

 

 

 

 

 

 

 

 

 

 

 

 

 

 

 

어릴 때 우리 동네에 있던 물레방아에 비해 크기는 작아도 모양은 흡사하다.

 

 

 

 

 

 

 

 

 

 

이 다리는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건너 편에 있는 멋진 정자 <취한대> 에 가보자고 했는데 여그서도 잘 보이느만 왜 가냐고  꿈쩍않고 앉아 있는 아저씨들.

 

 

 

취한대로 건너 가는 징검다리에서 찍었음

 

 

 

    죽계천을 바로보고 지어진  <취한대>는 퇴계 이황이 이름을 붙인 것으로 '푸른 연화산의 산기운과 맑은 죽계의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이라고 한다.

 

 

 

 

서원 앞에 뭔 당간지주 인가 했더니 이 곳이 예전에 숙수사란 절터였다네.

 

 

 

 

 

하이고 이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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