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산책

우리말 산책(66) ― '늙다/늙은'의 품사

뜰에봄 2009. 5. 11. 21:11


(<우리말 산책>도 65회를 넘기니 이제 나이만 잔뜩 들어 ‘지공거사’―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居士가 되었네요. 이를 기념(?)하여
이번에는 ‘늙는다’는 단어를 끄집어내 보았습니다. 그래 보아야 기껏 ‘늙다’의 품사가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이지만 말입니다.
딱딱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이니 어지간하면 일찍 발길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젊은 사람과 늙은 사람’의 ‘젊은’과 ‘늙은’의 품사가 무엇이겠느냐고 물으면 너무 싱거운 질문이 될까요? 무엇보다 영어의
young과 old가 다같이 형용사라는 걸 아는 우리로서는 이걸 놓고 머뭇거릴 일은 없을 듯합니다. 아마 대부분 둘 다 형용사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뭐가 좀 수상쩍지요? 그렇게 싱거운 문제라면 왜 내겠느냐, 여기에 무슨 함정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런 의심이 든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 싱거운 문제가 아닙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젊은’은 형용사이지만 ‘늙은’은 동사입니다.  

우리말의 동사와 형용사는 그 차이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당장 동사 ‘웃-다’가
‘웃-고/웃-으니/웃-으면/웃-지만/웃-더라도/웃-겠다’로 활용하는 모습과 형용사 ‘좁다’가
‘좁-고/좁-으니/좁-으면/좁-지만/좁-더라도/좁-겠다’로 활용하는 모습이 얼마나 같습니까? ‘웃는 얼굴’과 ‘좁은 골목’을 보아도
그렇지요. ‘손님들이 앉았어요’와 ‘손님들이 많았어요’의 동사 ‘앉다’와 형용사 ‘많다’가 한 문장의 서술어 노릇을 하는 방식도
아주 흡사합니다. 영어의 동사와 형용사가 공통점이라고는 없이 확연히 구별되는 것과는 사뭇 사정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말의 동사와 형용사도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당장 ‘웃는 얼굴’에서처럼 동사는 ‘-는’을 취할 수
있는데 형용사는 그렇지 못하여 ‘좁는 골목’과 같은 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웃는다/웃는구나’처럼 동사에 붙는 ‘-는다/-는구나’도
형용사에는 붙지 못합니다. ‘골목이 좁다/골목이 좁구나’라고 하지 ‘골목이 좁는다/골목이 좁는구나’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동사의 경우는 대개 ‘그만 웃자/그만 웃읍시다/웃지 말자’와 같이 어떻게 하자는 제안을 할 수 있지만 형용사의 경우는
그것도 불가능합니다. ‘제발 골목이 좁자’가 안 되는 것입니다. ‘고맙다’나 ‘귀엽다’ 같은 형용사도 ‘참으로 고맙자’나 ‘앞으로는
귀엽지 말자’와 같은 말은 성립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젊다’와 ‘늙다’에 적용해 보면 ‘젊다’는 여러 면에서 형용사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젊는 모습’도 안 되고,
‘아직 젊는구나’도 안 되지 않습니까? ‘젊은 모습’, ‘아직 젊구나’라고 해야 정상적이지요. ‘이제 그만 젊자’라든가
‘우리만은 젊지 맙시다’처럼 말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늙다’는 사정이 다릅니다. ‘늙는 것도 서러운데’에서 보듯 ‘-는’을 취하기도 하고, ‘너는 통 안 늙는구나’에서처럼
‘-는구나’도 취합니다. 또 ‘우리 이제 그만 늙읍시다’나 ‘우리만은 늙지 말자’가 적어도 말로는 성립합니다. 동사로서의 요건을
다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의미를 따져 보아도 두 낱말은 차이가 있습니다. ‘젊다’는 성질이지만 ‘늙다’는 과정이요 움직임입니다. 한영사전
New Korean-English Dictionary (1968)에서 ‘젊다’를 ‘is young’이라 하고 ‘늙다’를 ‘grows old’라고 한 것은 이 점을 잘 포착한 것으로
보입니다. ‘젊다’는 ‘작다/예쁘다/기쁘다/따뜻하다’들처럼 성질을 나타내지만, ‘늙다’는 ‘먹다/변하다/곪다’들과 마찬가지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낱말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늙다’의 품사를 물으면 잘못 대답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저는 국문학과 학생들에게도 ‘늙다’의 품사를 묻는 문제를
자주 내곤 했는데 그만큼 ‘늙다’의 품사를 올바로 아는 일은 이쪽을 전공하는 사람에게도 쉽지 않은 듯합니다. 심지어
국어사전에서조차 틀리게 기술해 놓기까지 하는 걸 보면 말입니다. 특히 ‘늙은 사람’의 ‘늙은’은 상태를 나타내므로 적어도
이 경우는 형용사라고 기술한 사전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 ‘썩은 나무’, ‘젖은 땅’의 ‘죽은/썩은/젖은’ 등이
다 형용사라고 해야 하는데 이런 품사 체계는 있을 수 없습니다.

앞에서 ‘성질’과 ‘움직임’으로도 형용사와 동사가 구별되는 점을 얘기했습니다만 보통 두 품사를 구별하라고 하면 이 기준으로
하려고 하지요. 그러나 이 기준은 유용하기는 하지만 선을 분명히 긋기 어려운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령 ‘모자라다’가
동사인지 형용사인지를 가릴 때 이게 성질인가 움직임인가로 판가름하려고 들면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던 기준으로
‘모자라는구나’ ‘모자라는 일손’이 되는 것으로 판정하면 동사라는 걸 쉽게 알아낼 수 있습니다.

어디 ‘모자라다’의 품사를 자녀들에게 한 번 물어 보시지요. 못 맞추면 그래 여태 동사와 형용사도 구별할 줄 모르고 뭘 배웠니 하고
큰소리칠 절호의 기회를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모르다’로 물어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이제 와서 여러분 스스로
‘모르다’가 무슨 품사인지 모르겠다고 하시지는 않으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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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울/채병수   - 2009/03/30 18:14:20  
참 우리 말인데도 정말 어렵습니다.
당연히 늙은과 젊은은 둘 다 형용사라고만 생각했지 다른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딱 짚어주시니 알 것 같습니다만 또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릴 것 같습니다.
-는구나로 말이 되면 동사, 그렇지 않으면 형용사 이리 알고 있으면 되겠지요? ^^
배짱이   - 2009/03/30 18:16:46  
늙다....가 동사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었는데.....
늘 좋은 가르침 배워갑니다.
감사드립니다. ^^*
물푸레   - 2009/03/30 18:55:58  
동사와 형용사.... 아무런 생각없이 사용한 말에 일정한 규칙이 있다는 게 재미있고
신기합니다. 우리는 말의 뜻을 이미 알고있으니 이것 저것 변용하며 그것이 형용사인지 동사인지
구분할 수 있지만 외국 사람들에겐 참 어려울 것 같이 생각됩니다.
우화의강   - 2009/03/30 21:03:45  
아이들이 동사와 형용사를 구분하기 힘들어할 때
ㄴ다를 붙여서 자연스러우면 동사이고 그렇지 않으면 형용사라고 설명을 해 주곤 했습니다.
배우게 될수록 더욱 어렵게 느껴지는 우리말이기는 하지만
<우리말 산책>을 통해서 새롭게 돌아보고 다시금 익힐 수 있는 계기를 가질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지공거사라는 새로운 단어도 배웠습니다.^^
하늘 하늘   - 2009/03/30 21:04:51  
모르다가 무슨품사인지 전혀 모르겠는데요.ㅋㅋ
우리말 이지만 너무 어렵습니다.
힘들여 가르켜주신 좋은 말씀들이 조금만 지나고 나면 ...
까마귀 고기를 먹었는지. ㄲㄲ
두루미   - 2009/03/30 22:15:07  
아..... 너무너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저도 '늙다'의 품사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이제 확실히 알게 되었고, 응용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제가 모르는(이래서 동사라는 말씀이지요? ^^) 부분의 면적이 덕분에 조금 좁아진 셈이지요.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오랜만에 노인봉 님과 함께 한 산책, 참으로 유익하고 즐거웠습니다...
불태산   - 2009/03/31 00:18:48  
뭔지 잘 모르지만 저도 산책을 같이 하고갑니다.
늘 글을 보면서 제가 국어를 배웠는지 기억에 없다는..
품사부터 다시 공부해야할까봅니다.
아낙네   - 2009/03/31 01:06:44  
재미있고 유익하고... 기억도 쏙쏙 ^^
신참이라 선생님의 글을 많이 접 해 보지 못했어요.
우리말 산책66이라 하니 쭉 찾아 읽어 보고 싶어집니다.
감사히 배우고 갑니다.
뜰에봄   - 2009/03/31 04:51:13  
딱딱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이니 어지간하면 일찍 발길을 돌리하고 하셔서 사실은
발길을 돌리려다 살짝 마음을 고쳐먹었는데 안 돌리길 잘 한 것 같습니다.ㅎㅎ...
동사와 형용사의 구분할 때 동사는 ‘-는’을 취할 수 있는데 형용사는 그렇지 못하다고
일러주시는 말씀이 귀에 쏘옥 들어옵니다.
무엇보다 이렇게 글로나마 뵐 수 있게 되니 반가운 마음 가득합니다.
할리킴   - 2009/03/31 10:47:32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인디카에 흔적을 남기려면 쓴글을 몇번이나 다시보곤 합니다만
점점더 어렵습니다. 그래도 배우는 자세로 임합니다.
감사합니다.
花中   - 2009/03/31 10:47:37  
발길 돌리라는 글귀가 끝까지 읽어 보라는 '무언의 반지' 같았습니다. 고맙습니다.
딤아   - 2009/03/31 22:25:15  
진작에 좋은 선생님을 만났으면... 그래봐야 금방 잊어버리지만요. ^^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제안, 성질과 움직임 그래도 안 되면 ~는다 ~는구나로 동사를 구분한다.
이렇게 쉬울 수 가요.
무산(霧山)   - 2009/03/31 22:42:19  
오늘도 재미있고 좋은 가르침을 받고 갑니다.
65세가 넘으면 지공거사가 된다는 것을요...
지공거사 다음은 지하거사일까요? ㅎㅎㅎㅎ
나도바람꽃   - 2009/04/01 10:55:46  
지거공사님의 내공이 자랑스러운 사월의 첫날입니다.
조팝나무   - 2009/04/01 11:05:21  
우리말 산책, 몇군데 카페에 가입을 하고
공부를 하겠노라 하지만
왜 이리 어렵기만 한지요.
마음은 97% 공부는 3%로의 현실
그래도 언제나 공부하는 자세로 살아가려 합니다.
감사히 배우고 갑니다.^^
꼬꼬마/백태순   - 2009/04/01 17:41:22  
어지간하면 일찍 발길을 돌리라는 말씀에 더 열심히 읽어봐야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답니다. ^ ^

['젊다’는 성질이지만 ‘늙다’는 과정이요 움직임입니다]
이 구절이 유독 와 닿습니다.

어느날 가장 번잡한 시내에서 잘 차려있은 이십대들 사이에서 유독 제 눈길을 끄는 초로의 아주머니의 모습을 보고서는
저렇고 곱게 잘 늙어 가고 싶다는 작은 바람을 가지게 되었답니다.
젊다는 것 만으로도 아름다울 수 있지만 아름답게 늙을 수 있는 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때문입니다.
과정의 움직임(행동)이 어떠했느냐에 따라 달라지니까요.
소년의 순수와 열정을 오래토록 지니고 계신 노인봉 님께서도 제게 잘 늙어가는 하나의 모범답안이시기도 합니다. ^ ^
노인봉   - 2009/04/02 20:39:35  
발길을 돌리시라는데도 <너무너무 재미있다>는 분이 안 계시나 기어이 다녀가신 분들이 많으시네요.
특히 딤아 님 참 오랜만입니다. 반갑습니다. 花中 님도 금대봉에서 뵙고는 거의 처음인 것 같아요.
아낙네 님도 이제 구면이 되어 좋군요.
앞의 글 결론을 잘못 내린것 같아요. <우리 절대로 늙지 맙시다> 그러든가 <우리 다같이 곱게 늙읍시다>
그랬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꼬꼬마 님, 곱게 늙기보다는 안 늙는 게 더 좋겠지요?
솔바람   - 2009/04/16 21:44:11  
한참 지난 후에야 봅니다.
잘 계시지요.
노인봉님 그리고 함께 산책길에 나서신 님들도요.
좀더 자주 들리고 뵈어야 하는데 봄이 다가고서야 들리나 봅니다.
항상 좋은 글 그리고 좋은 댓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