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얘기를 거듭 세번이나 하는 것도 그렇고 더욱이 이렇게 무거운 글을 올려 죄송합니다. 혹시 그동안 이쪽으로 명쾌히 풀리지 않아 고심했던 분도 계실 것 같아 용기를 내 보았습니다. 용어 중 어렵게 생각되는 것은 질문 주시면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광화문에 새로 세운 세종대왕 동상 설명문에서 ‘한글’을 어처구니없게도 Korean Language로 번역해 놓았다고 비판이 일더니 이번에는 그것을 고친다는 게 여전히 부정확하게 Korean Character로 해 놓았다고 하여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왜 이 개명 천지에 이 기초적인 용어 하나를 제대로 번역하지 못하고 쩔쩔매고들 있는지 딱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당사자들 변명으로는 영문학자한테 조언을 구했다고도 하고 원어민에게 자문을 구했다고도 하는데 이것은 단순한 용어가 아니고 전문용어인 만큼 문자론을 전공한 사람에게 물어볼 일이요, 무엇보다 외국 학자들이 ‘한글’을 영어로 어떻게 부르는가를 참조하는 일이 가장 확실한 길일 것입니다. 이제는 한글이 워낙 널리 알려져 아예 Hangul 또는 Han'gŭl과 같은 고유명사로 불리면서 어지간한 언어학 저술이면 책 뒤의 Index에 Hangul이나 Han'gŭl이 올라 있고 F. Coulmas의 The Blackwell Encyclopedia of Writing Systems (Oxford, 1999)에는 표제어로도 올라 있습니다만, 그것을 영어로 어떻게 부르는지는 언어학개론이나 용어사전 등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그중 몇 예만 보기로 하겠습니다.
(1) The fruit of the King's labor was the Korean alphabet, called Hangul, which had seventeen consonants and eleven vowels. (V. Fromkin and R. Rodman, An Introduction to Language 6판, 1998:503)
(2) The Korean alphabet, invented in the years 1443-46, is the only true alphabet native to the Far East. (K. Kalzner, The Languages of the World, 1995)
(3) A native Korean alphabet of 28 letters (Onmun, or 'common script') was introduced in the 15th century, and is still used in modified form. (D. Crystal, An Encyclopedic Dictionary of Language & Languages, 1992)
‘한글’이 한결같이 Korean Alphabet으로 불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Korean alphabet이라는 용어를 좀더 확실하게 확인하려면 G. Ledyard의 학위논문을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1966년 버클리의 캘리포니아대학교 박사학위 논문인 이 논문은 전적으로 한글에 관한 것으로 논문의 제목에서부터 각 장의 제목, 가령 제5장의 Early History of Korean Alphabet에 이르기까지 Korean alphabet이라는 용어가 수없이 나오니까요. 또 Kim-Renaud 교수가 편찬하여 1997년에 하와이대학교 출판부에서 간행한 책은 제목이 아예 The Korean Alphabet으로 되어 있으니 더 확실한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의 언어』의 영문판 The Korean Language (New York, 2000)에서도 ‘한글’은 으레 Korean Alphabet으로 나옵니다.
흔히 알파벳이라 하면 영어를 표기하는 글자만 가리키는 용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alphabet은 자모문자(字母文字)를 가리키는 언어학 용어입니다. 그래서 영어나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을 적는 문자를 Roman(Latin) alphabet이라 하고, 러시아어, 불가리아어 세르비아어 등을 적는 문자를 Cyrillic alphabet라 하듯이 한글을 Korean alphabet라 부르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DeFrancis 같은 학자는 그의 Visible Speech (1989)에서 Korean Hangŭl alphabet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역시 같은 명칭이라 하겠습니다.
Korean alphabet 대신 Korean script를 쓰기도 하고 Korean writing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나 script나 writing은 자모문자만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고 문자 전반을 가리키는 용어여서 ‘한글’보다는 ‘한국문자’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한국문자라면 어차피 한글이니 결과는 마찬가지라고 할 수도 있으나 엄격히 보면 우리는 한글 이전에 이두(吏讀)나 구결(口訣)과 같은 표기법을 고안해 쓴 것이 있으므로 딱 한글만을 가리키려 할 때는 역시 Korean alphabet이 더 정확한 번역일 것입니다.
그러면 Korean character의 character는 어떨까요? 문자에 대해 얘기할 때 낱자 하나하나를 가리키느냐 그 문자 체계를 통틀어 가리키냐에 따라 용어를 달리 씁니다. 한글의 ‘ㄱ’이나 ‘ㅛ’와 같은 낱자를 가리킬 때는 alphabet이라든가 writing이라 하지 않고 letter라고 하는데 character도 그런 낱자를 가리킬 때 쓰는 용어입니다. 그러니까 letter의 뜻으로 쓰는 용어인데 보통은 한자(漢字)의 낱자를 가리킬 때 씁니다. 우리가 흔히 ‘옥편’이라 부르는 것을 character dictionary라고 부르는 데서도 그 용법을 볼 수 있습니다. 한글을 두고도 ‘28자’를 ‘28 characters’라 하거나 ‘ㄱ’이나 ‘ㅛ’ 같은 개별 글자를 ‘Korean character ㄱ’, ‘Korean character ㅛ’와 같이 부를 수는 있겠고, 또 한글은 특이하게도 이른바 모아쓰기를 하여 ‘소/말/흙’처럼 자모의 수로 보면 각각 두 개, 세 개, 네 개임에도 이것들을 묶어 글자 하나로 치는데 이들을 이를 때에 character를 써서 ‘Korean character 흙’과 같이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글을 창제하신 분”의 ‘한글’을, 문자 체계로서의 ‘한글’을 Korean character라고 번역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한글의 창제’라고 할 때 ‘창제’를 어떻게 번역하느냐도 아울러 검토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번의 세종대왕 동상의 설명문 수정 중에는 ‘한글’을 Korean language에서 Korean character로 고친 것뿐만 아니라 invent를 device로 고친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즉 “King Sejong the Great, who invented our national language Hangeul”을 “King Sejong the Great, who devised the Korean characters Hangeul”로 고친 것입니다.
‘문자의 발명’, ‘문자를 발명했다’ 등 문자를 두고 ‘발명’이라는 용어는 언어학에서 널리 쓰이는 용어입니다. 당장 이 방면의 고전인 M. Cohen의 La Grande Invention de L'écriture et son Évolution (Paris, 1958)에서 invention을 볼 수 있습니다 경우 영어와 프랑스어가 같습니다). 문자론의 또하나의 고전인 I. J. Gelb의 A Study of Writing (Chicago, 1963)에서도 invention 또는 invent라는 용어가 빈번히 쓰인 것을 볼 수 있는데 그중 하나만 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개론서에 쓰인 예도 하나 더 보입니다.
(4) In both scholarly and popular books we often meet with statements about the invention of writing. (…) Writing , like money, or the wireless, or the steam engine, was not invented by one man in one certain place in one particular period. (I. J. Gelb, A Study of Writing, 1963:198-9)
(5) Writing is the single most important sign system ever invented on our planet. (…) writing was invented quite recently. (E. Finegan, Language: Its Structure and Use, 1999:427)
대부분의 문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조금씩 보태지고 고쳐지고 하면서 만들어져 누가 책상에 앉아 골똘히 생각하다가 어느 날 드디어 다 됐다고 발표하는 그런 개념의 ‘발명’과는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흔히 지적합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문자의 경우 ‘발명’이라는 용어가 부적절한 면이 있다는 단서를 다는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글은 언제 누가 만든 것인지를 아는 진정한 의미의 발명품이고, 그 점에서 특별한 문자입니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했다고 했을 때의 ‘창제’를 invention, ‘창제하다’를 invent로 번역하는 것은 더없이 맞아떨어지는 경우일 것입니다. 이 용례는 이미 앞의 예문 (2)의 “The Korean alphabet, invented in the years 1443-46”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invent/invention 대신 create/creation을 쓴 수도 있는데 이는 마찬가지 용법이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devise도 아주 틀린 번역은 아니지만 한글의 경우는 아무래도 미흡한 표현이라 해야겠습니다.
이제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을 영어로 어떻게 번역해야 할 것인지는 다 밝혀진 것 같습니다.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한글’은 이미 고유명사가 되어 굳이 번역할 것 없이 Han'gŭl, 또는 Hangul로 해도 좋을 수도 있을 것이나 좀더 친절히 Hangul, the Korean alphabet이라 하는 것이 가장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창제’는 invent를 쓰는 것이 가장 무난해 보입니다. 다만 여기서도 ‘한글’의 로마자 표기를 어느것으로 하느냐의 문제가 남을 것인데 굳이 우리 로마자 표기법을 고집하기보다는 이미 외국에서 널리 쓰이는 것 중 Hangul 정도를 쓰는 게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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