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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학생들을 모아 놓고 “한글을 누가 만드셨지요?”라고 물으면 다들 서슴없이 “세종대왕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한글을 세종대왕이 창제하였다는 것은 너무나 기초적인 상식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세종대왕을 드는 것도 무엇보다 한글 창제 때문이겠지요. 세종의 한글 창제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들이 있습니다. “이달에 임금께서 언문 28자를 친히 지으셨다 … 이를 훈민정음이라 하였다(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 是謂訓民正音)”라는 세종실록(25년 12월)의 기록이나 “내가 이를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노니”라고 한 훈민정음의 머리말 등이 그것입니다. 물론 『訓民正音』(해례본)의 끝에 붙은 정인지의 서문 “계해(癸亥)년 겨울 우리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창제하시고 … 이름하여 훈민정음이라 하셨다”에서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위의 기록들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임금이 친히 지으셨다”는 것은 모든 영광을 임금에게 돌리려는 수사(修辭)가 아니겠느냐, 임금이 바쁜 정무(政務)에 어찌 그 어려운 일을 혼자 하였겠느냐, 손수 집현전까지 만들었는데 당연히 그 젊은 학사들을 활용하지 않았겠느냐 하는 생각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 어디에도 이를 뒷받침할 만한 기록이 없어 막연히 추측으로 만들어진 생각들인데 어찌된 일인지 꽤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의외로 넓게, 그나마 부정확하게 이 생각들이 퍼져 있습니다. 언젠가 미국 교포 2세들이 하기로 되어 있는 연극의 대본을 미리 본 일이 있습니다. 마침 한글 창제를 다룬 연극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에게 “자, 이제 돌아가서 한글을 지어 올려라!”라고 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아이고! 저는 당장 그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 방면의 논문을 하나 보내니 읽어 보세요 그랬습니다. 그보다 더 황당한 일도 있었습니다. 『한국의 언어』의 영어판인 The Korean Language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2000)의 서평에서 어떤 분이 그 책에서 한글이 거의 세종 혼자 창제했다고 기술한 것에 대해 엉뚱한 비판을 한 것이 그것입니다. 한글을 창제하는 일에 도움을 얻고자 우리나라 학자가 중국 요동으로 황찬(黃瓚)을 열세 번이나 찾아갔는데 어떻게 세종이 혼자 한글을 창제했다고 하느냐고 한 것입니다. 서평을 쓴 분은 우리나라에서 영문학과를 나와 미국에 가 언어학박사가 되어 거기서 교수를 하는 분이었는데 아마 고등학교 때쯤 잘못 배운 지식을 가지고 이런 무책임한 소리를 한 것 같습니다. 신숙주와 성삼문이 중국학자 황찬을 만나러 요동을 찾아간 것은 훈민정음이 창제되고 난 뒤에 다른 목적으로 갔다는 것은 이제 국어학계에서는 상식이 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떠도는 소문을 대단한 지식으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또 한 번 잘못 박힌 생각은 좀체 털어내지 못하는 습성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이렇듯 헤매게 한 책임은 이 방면으로 충분한 연구를 해 놓지 못한 학계에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 미국 교포에게 보내 주겠다고 한 논문은 「훈민정음 친제론(親制論)」이라는 이 방면의 최초의 본격적인 논문입니다. ‘친제’가 다른 데에서는 쓰이지 않은 용어로 그것이 수사적인 표현일 수 없고, 또 훈민정음이 완성된 세종 25년 음력 12월까지 집현전 학사들이 그 일을 알고 있었던 흔적이 없었다는 것 등 여러가지 논거를 치밀히 제시하면서 한글을 세종이 ‘친히’, 혼자의 힘으로 창제한 것임을 밝힌 것입니다. 그런데 이 논문이 발표된 해가 1992년입니다. 그 이전 1946년에 발간된 『훈민정음 발달사』에서도 같은 방향의 이야기가 있었으나 전체적으로는 회의론만 무성하다가 이 방향으로 확실한 논문이 나온 것이 이렇듯 최근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헤매고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한글이 세종의 ‘발명품’이라는 것을 좀 편안하게 믿어도 좋을 듯합니다. ‘친제’에 대한 회의론은 훈민정음의 체계가 고도의 전문적인 이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점을 들어 세종이 그런 깊이 있는 학식이 있었겠느냐는 주장을 폅니다. 그러나 세종은 임금이기 전에 뛰어난 학자였음을 바로 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최만리 등이 올린 반대상소문에 대한 답변에서 너희들이 이런 이론을 아느냐 내가 아니고 누가 이 일을 하겠느냐라고 한 대목도 있습니다만 세종의 학문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높은 경지에 올라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맞춤법은 어떻게 보면 매우 첨단적입니다. “산이 높지도 않고 사람도 없네요”를 “사니 놉지도 안코 사람도 엄네요”와 비교하면 비록 소리와 멀어지더라도 기본형을 흩트리지 않으려는 정신을 살리고 있는데 이런 맞춤법이 독서능률을 높이는 것이어서 더 이상적(理想的)이라는 인식은 서양에서도 20세기 후반에 와서야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세종은 그 옛날에 이런 맞춤법을 구상하고 있었음을 『월인천강지곡』같은 데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대단한 학자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인지는 서문에서 “하늘이 성인(聖人)이 나타나기를 기다려 그 손을 빌려 한글을 짓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만 오늘날 우리가 이처럼 뛰어나고 편리한 한글로 누리는 크고도 큰 혜택을 생각하면 정말 하늘이 도와 한 성군(聖君)을 보내 주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한글 창제 이전에 시도되었던 몇 가지 일들이 어떤 결실을 보았다면 우리는 좀더 일찍 우리의 문자를 가졌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일이 없었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그랬더라면 세종이 한글을 만들 생각을 안 했을 것이고 어쩌면 오늘날까지 꽤도 불편한 문자생활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세종을 생각하면, 아니 한글을 생각하면 저는 늘 우리 민족이 좋은 운을 타고 났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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