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트가 K에게 말했다.
뮤트: 이봐 K. 학문을 영어로 무엇이라고 쓰는가.
K:학문!! 학문?, 학문이 머시냐..에또..참나 갑자기 딱 물으니 생각이 안나네요.
뮤트: 학문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사이언스(science)라고 나오고 있네.
K: 사이언스는 과학아녀요?
뮤트: 글쎄. 그 과학과 동일 시 하는 게 요즘 학문이라네. 사이언스라는 말은 20세기 이후에 정착된 웃기는 용어이고 본래는 쎄오리(theoly)란 말이 학문의 의미였다네.
K:응. 맞아요! 쎄오리(theory)! 그거 이론이란 뜻이자나요. 무슨 이론, 무슨 이론 할 때..그 이론요..
뮤트:
그렇네. 그 쎄오리(theoly)가 본래 학문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 용어는 플라톤이 사용한 떼오로기아(Φεολογια)란 용어에서 나온 말인데 본래는 학문이란 뜻이 아니었다네. 플라톤의 처음 사용한 떼오로기아(Φεολογια)는 본래 “신” 이란 의미의 떼오(Φεο)와 “말하다‘란 의미의 로기아(λογια)로서 이루언 진 말로서 “신이 말하다”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였다네. 그런데 기원후 2세기 경, 교부 철학자들에 의해 “신이 말하다”라는 뜻의 “떼오로기아(Φεολογια)”가 “신에 대하여 말하다”로 슬쩍 바꾸어졌단 말일세. 그리고 로마 카톨릭(천주교)의 교황제 시대에 이르러 “떼오로기아(Φεολογια)”는 “신”이란 단어마저 빼버린 채 “학문”이란 의미로서의 라틴어 즉 떼오로지카(Theologica)로 그리고 영어의 쎄오리(theoy)로 점차 변질되고 만 것이라네. “신이 말하는 신학”과 “신에 대해서 말하는 철학”이 혼동되기 시작한 것이지. 즉 철학이 신학이 되고 신학이 학문이 되면서 신은 교묘하게 사라지고 철학과 학문만 남은 것이라네. 학문이란 용어의 탄생자체가 말 바꾸기로서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학문의 운명이 된 것이지. 이 세상 모든 학문은 말 바꾸기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네. 학문은 본래 온전한 진리를 묘사할 때는 모든 가정을 배척한 채 “~은 반드시(정녕)~이다”로 끝나야 하는데 말 바꾸기 때문에 학문은 “~은 ~일지도 모른다” 혹은 “~은 ~일까한다”식의 문장구조를 지니게 되었다네. 즉 모든 학문이 가정(假定)을 전제로 하는 “~일까 하노라”식의 장애적 패러다임을 갖게 된 것이라네. 이 최초의 논리적 실패를 누가 시작했는지 자네 아는가...
[창세기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3:1-3]
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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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가는 시작부터 인터넷에 올린 뮤트의 평론을 단서로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이 연가에 몇 편의 평론을 올렸으나 이 연가에 올리지 못한 평론은 더 많다. “돌아오지 못하는 사막 타클라마칸”, “도올 김용옥 선생을 논함”, “그리스 신화, 정면(正面)에서 바라보기” 등의 평론은 연가 스토리와의 무관성, 또는 몇 가지 다른 이유로 연가에 올리지 못했다. 당시의 뮤트는 사이버 지식사이트에서 제법 한 가락하는 논객으로 대접받고 있었다. 댓글 논쟁이 격한 특정 사안의 글이 지식사이트에 오를 때, 그들이 논쟁에 지치면 “이 문제에 대해서 뮤트선생은 어떻게 생각하는가”하며 뮤트의 의견을 듣고자 하는 요청이 빈번했다. 뮤트는 그 때 마다 잘난 체 하며 오지랖 넓게 이것 저것 댓글로서 자기 의견을 피력했다. 그들은 뮤트를 어느 대학의 저명한 교수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번은 어떤 사이버 논객이 그리스 신화를 두고 신화의 비 교육적 내용을 비판하면서 그리스 신화를 어린이를 비롯한 학생들의 방학기간 읽어야할 추천도서로 올리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이 논제가 게재되자 그 논객은 많은 반대 댓글에 궁지에 몰렸던 모양이었다. 그는 소수파로서 저항하다가 이 문제를 "뮤트 교수의 의견을 들어보자“고 제안했다. 그 제안 속에는 뮤트가 소수파인 자기를 도와달라는 묵시적 요청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리고 늘 소수파에 있었던 뮤트의 평론 취향에 비추어서도 같은 소수파인 자기에게도 유리한 논리를 제공할 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가 깔려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 논객의 그러한 기대는 적중했다. 뮤트는 그 논객의 입장에 서서 그리스 신화의 등장인물과 신화 상의 스토리가 가지는 부도덕성에 한 표를 던지고 있었다. 그 때 마침 겨울 방학을 앞두고 있었으므로 댓글 논객들 중 한사람이 뮤트에게 재미있는 제안 하나를 던지고 있었다. 그것은 뮤트 교수가 그리스 신화를 내용으로 학생들에게 기말고사를 낸다면 어떤 문제를 내겠는가고 물은 것이다. 뮤트는 댓글로서 만일 그리스 신화를 두고 학생들에게 문제를 낸다면 이런 문제를 내겠다며 한 가지 화두를 제안한다. 그것은 “기독교의 십계명과 신명기의 율법을 가지고 그리스 신화의 등장인물의 율법적 죄를 단죄해 보라”는 꽤 긴 제목의 과제였다.
즉각 많은 사람들이 뮤트가 신학대학교 교수인가를 질문해 왔다. 뮤트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또 많은 사람들이 뮤트가 크리스천인가라고 물어왔다. 뮤트는 그것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 문제는 의외로 몇 몇 사람들이 댓글로서 답안을 제출하는 상황으로 발전했다. 답안을 제출한 사람들은 크리스천들로 추정되었다. 문제의 제출로서 그 사안이 종결되었으면 좋으련만 답안을 작성한 사람들이 자기의 점수가 몇 점이며 정답이 무엇인가를 밝히라고 요구해 왔다. 뮤트는 어쩔 수 없이 그 문제의 정답지로서 긴 평론을 발표한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 신화, 정면(正面)에서 바라보기”였다. 그 평론은 무려 12회에 걸쳐 발표되었으며 112페이지에 이르는 평론으로서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헬레니즘의 최고봉에 있는 그리스 신화의 대표적인 등장인물 70여명의 신화이야기를 헤브라이즘의 최고봉인 구약의 신명기가 가지는 율법으로서 그 정죄성 여부를 논해 보는 것이 그 평론의 골자였다. 112페이지나 되는 분량이므로 여기 이 연가에 올리기에는 너무 장황하고 방대한 글이다.
70여명의 그리스 신화의 등장 인물들이 펼치는 스토리 중에서 율법과 도덕률에 배반하는 장면을 하나하나 논증한 후 뮤트는 최종적으로 그리스 신화의 주요한 특징으로서 두 가지를 지적했다. 즉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신이 땅과 하늘을 만든 것이 아니고 하늘과 땅에서 신들이 창조되는 것이며 이것은 그리스 신들이 창조주가 아니고 이차적 피조물이라는 점, 그리고 그리스 신화는 지옥(타타로스)은 있으되 천국은 없는 비 대칭적 내세관을 가졌다는 점을 지적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 신화에서 카오스와 가이아로 대표되는 두 신, 그리고 그 자식들로서의 수많은 신들에게서 카오스 이전의 또 다른 하나의 존재를 발견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즉 카오스를 만든 선재적 신은 누구냐하는 것이며 그리스 신화의 지옥의 내세관에 대칭되는 또 다른 하나의 신화, 즉 천국의 신화를 발견해 내어야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고 쓰고 있었다.
또 사람들은 즉각 질문했다. 그리스 신화에 대칭되는 신화는 구약의 전승이 아니냐고, 그러나 구약에서는 이미 천국과 지옥이 동시에 존재하므로 그리스 신화가 잃어버린 천국은 구약에서가 아니라 다른 신화에서 찾아야 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고 있었다. 뮤트는 그것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대답했다. 혹시 구약, 즉 성경의 내세관은 천국 뿐이며 지옥은 그리스 신화의 지옥 개념을 그대로 옮겨 놓았을 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구약과 그리스 신화는 내세관에서 서로 쌍대적(雙對的) 관계, 대칭적 관계에 놓일 수도 있다고 피력했다. 뮤트는 그 평론에서 성경의 논점들에 대해 매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었다.
“그리스 신화 정면에서 바라보기” 이 평론은 뮤트가 사이버 상에서 게재하는 마지막 평론이 되었다. 이 평론이 마지막이 된 것은 다음 평론이 준비되기 전에 연가가 종결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까지의 평론은 그녀의 의지였으며 뮤트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없으면 평론은 없다. 연가가 종결되면 평론도 없는 것이다.
이 평론은 단지 평론만으로 끝나지 않앗다. 이 평론이 끝나자 그녀는 뮤트에게 아주 생소한 하나의 제안을 해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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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트님. 이번 평론을 보고 너무 놀랐습니다. 언제 성경에 대해 그렇게 해박한 지식을 가졌는지.. 정말 기절할 정도였어요. 저 몰래 언제 그렇게 공부하셨는지..기가막힙니다. 뮤트님. 정말 혼자서 그 외로운 먼 길을 오셨습니다. 여기 까지 오기가 쉽지 않아요. 여기까지 오는 분들이 별로 없었다구요. 혼자서는 올 수 없는 길을 뮤트님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서 여기까지 오신 것입니다. 자..여기 까지 오셨으므로 뮤트님은 이제 더 먼 길을 갈 수가 있습니다. 목회자가 되라는 말씀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신학대학의 대학원, 석, 박사과정에 들어가셔서 더 먼 길을 떠나셔야합니다. 제게 그렇게 하겠노라 약속해 주세요. 제발.. 저를 사랑한다면 그것으로 제게 대한 사랑을 증명해 보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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