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살짜리 손녀가 이제는 제법 저와 좋은 친구가 되어 줍니다. 이놈은 좀 활달하고 적극성이 있어 누구랑 놀든 제 놈이 주도하기를 좋아하는데 바둑돌을 가지고 놀면서도 할아버지는 아빠 해, 난 엄마 할게, 이건 밥이고 이건 김치야 그러면서 놉니다. 이놈이 그렇게 저를 먼 옛날로 이끌어 갑니다. 누구든 어렸을 때 어떤 형태로든 소꿉질은 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그걸 뭐라 불렀는지 기억이 나시는지요? 저의 고향에서는 ‘종곱질’이라 하고 그때 쓰는 사금파리를 ‘종곱파리’라 했는데 이상하게 들리지요? 그런데 이것만 이상한 게 아닐 것입니다. 누가 또 자기 고장에서는 뭐라고 했다고 하면 그것도 대개는 낯설게 들릴 것입니다. 좁은 땅에 웬 사투리가 그리 많으냐고 하지만 ‘소꿉질’의 사투리는 유난히도 많은 것 같습니다. 지난번의 ‘부추’의 사투리도 그리 적은 것만은 아니었지만 ‘소꿉질’의 사투리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라고 할 만합니다. 『한국언어지도』를 만들면서 이놈은 하도 복잡하여 몇 번이나 빼버렸다가 그래도 아까운 생각이 들어 작성하긴 했는데 얼마나 여러 번 고쳐 그렸는지 모릅니다. 워낙 복잡하여 목록을 정리하는 일도 쉽지 않고 그것을 계열별로 분류하기는 더욱더 어려운데 그래도 대략이라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소꿉질’계 : ㉮ 소꼽질, 소꿉질, 수꿉질 ㉯ 소꼽장난, 소꿉장난, 소껍장난, 소꿉장냥 ㉰ 손꼽놀이 ② ‘통굽질’계 : ㉮ 통굽질, 통곱질, 동굽질, 동갑질, 도꼽질 ㉯ 통굽장난, 통귑장난, 토꼽장난, 도꼽장난, 도꿉장난, 또꼽장난, 또꼽 ㉰ 도꿉놀이 ㉱ 통구바리, 동고파리, 도구파리, 도꼬파리 ③ ‘종곱질’계 : ㉮ 종곱질, 종갑질 ㉯ 종굽장난 ㉰ 쪼곤놀이 ④ ‘동두깨비’계 : ㉮ 동드깨미, 동디깨미, 동지깨미 ㉯ 동두깨비, 동도깨비, 동지깨비 ㉰ 동구까래 ㉱ 동니깨 ⑤ ‘반두깨미’계 : ㉮ 반두깨미, 반주깨미, 반조깨미, 방두깨미, 방드깨미 ㉯ 방두깨비 ㉰ 반두깽이, 반드깽이, 방두깽이, 방주깽이, 방지깽이, 빵뜨깽이, 빵주깽이, 빵깽이 ㉱ 반주까리 ㉲ 반두깨놀이 ㉳ 반두깨, 반주깨, 방주깨 ⑥ ‘바꿈살이’계 : ㉮ 바꿈살이, 바끔살이, 빠끔살이 ㉯ 바꿈새기, 바끔새기 ㉰ 바꾸매기, 바꼬매기 ㉱ 바까마리 ㉲ 바깜질 ㉳ 바끔 ㉴ 가꼼살이 ⑦ ‘새금박질’계 : ㉮ 새금박질, 새금팔질, 새깜질 ㉯ 새끔쟁이 ㉰ 삼바꼼질, 삼방질, 삼바꿈 ⑧ 기타 : 흑밥, 항가빠치, 살림살이, 세간살이, 노래깨미, 고방질, 바방질 어떤가요? 놀랍지요? 무슨 재주들이 있어 이렇게도 여러가지로 말을 만들어 냈는지 정말 감탄이 안 나올 수가 없습니다. 어디 숨은 그림 찾듯 자기가 어렸을 때 쓰던 사투리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시지요. 찾으셨나요? 이렇게 많이 늘어놓았는데도 혹시 빠진 것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얼마 전에 그렇지 님이 느닷없이 ‘동갑살이’가 뭔지 아냐고 하길래 자신은 없는 대로 소꿉질이 아니냐고 하니까 맞는다고 했습니다. 아버지한테 그 말을 듣고 오랫동안 까맣게 잊고 있다가 불현듯 어릴 때 많이 쓰던 게 되살아났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앞의 표에는 그 비슷한 것은 있는데 딱 거기에 맞는 말은 없네요. 방언조사라는 게 한 군(郡)에서 한두 사람씩을 데리고 하는 것이어서 어차피 빠지는 것이 있게 마련이지만, 몇 개가 동시에 쓰이는 것은 그중 대표만 올리기 때문에 빠진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 사투리가 이리도 유별나게 여러 갈래로 갈렸을까요? 참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정작 정답을 찾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억지로 짐작을 해 본다면, 소꿉질은 어릴 적에 겨우 몇몇이서 소규모로 하던 것이라 말의 쓰임도 자연히 좁은 울타리에서 맴돌았던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더욱이 소꿉질은 대개 여자애들이 하는 것이어서 아주 작은 세계를 이루고 있었을 것입니다. ‘쌀’이나 ‘씨름’ 같은 것이 전국을 무대로 쓰는 ‘전국형’ 어휘라면 ‘소꿉질’은 시골 동네의 한 모퉁이를 무대로 하는 ‘촌락형’ 어휘였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사투리도 잘게 세분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보는 것입니다. 그렇긴 하여도 ‘소꿉질’이라고 해서 한 마을에 갇혀 있을 수는 없었겠지요. 비록 멀리는 세력을 못 뻗쳤어도 인접한 지역끼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서 아주 같지는 않더라도 비슷한 사투리를 쓰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앞의 표에서 ① ‘소꿉질’계, ② ‘통굽질’계, ⑤ ‘반두깨미’계, ⑥ ‘바꿈살이’계 식으로 묶어 보면 같은 계열의 사투리들이 서로 이웃해 쓰이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앞의 지도에서 색깔로 구분을 해 놓았는데 그걸 보면 ①의 ‘소꿉질’계는 경기도와 충남 서북부에 퍼져 있고, ②의 ‘통굽질’계는 강원도와 충북 중북부 쪽으로, 그리고 전라남북도 및 충남 남부에는 ⑥의 ‘바꿈살이’계가 꽤 큰 세력을 펴고 있습니다. 한편 ④의 ‘동두깨비’계와 ⑤의 ‘반두깨미’계는 각각 경상남북도의 동쪽과 서쪽으로 갈려 쓰이는 것을 걸 볼 수 있습니다. ‘소꿉질’의 사투리는 우리에게 새로운 눈을 뜨게 해 주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똑같은 대상을 두고 이렇게 여러가지로 달리 말을 할 수도 있다는 게 놀랍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얼마나 다채롭고 찬란한 세상인가 그런 생각도 다시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사투리들의 운명을 생각하면 세상이 그렇게 밝아 보이는 것만도 아닙니다. 저 다채로운 것들이 빠른 속도로 하나씩 우리 곁을 떠나고 있으니까요. 우리의 ‘촌여자’ 그렇지 님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노라고 하였으니 누가 이 생명들을 지켜 줄 수 있겠어요? 하긴 이제 가지고 놀 사금파리도 없습니다. 놀아도 너도 나도 프라스틱을 가지고 놀겠지요. 그나저나 이제 누가 이 잗다란 놀이를 하겠어요, 신나는 게임이 넘치고 넘치는데. 우리들이라도 오늘 하루 잠시나마 먼 어린 시절의 꿈결 속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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