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마살

[스크랩] 어느 봄날의 이틀

뜰에봄 2012. 4. 11. 19:29

 

 

 

 

그대, 언제 이 숲에 와 보시렵니까?

여수 오동도? 거제 지심도? 그런 유명 메이커와는 전혀 다른 동백이 여기 있습니다.

요란하지도 현란하지도 않습니다. 정적이 감도는 절터에 그저 동백꽃만 무성히 피어있지요.

 

 

 

 

나무에서 한번, 땅에서 또 한번 피는 동백꽃.

광양 옥룡사지 동백 숲에는 그야말로 동백꽃 사태가 났더군요.

 

 

 

 

꽃 치고는 참 투박하고 촌빨 날리는 동백을 보려고 늙지도 젊지도 않은 여인들이 천리길을 달려왔습니다.

서울에서, 안산에서, 구미에서........ 그리고 울산에서 ㅎㅎ

 

 

 

 

저 그윽한 숲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저 숲 속에 팔난봉꾼이 숨어 있는들, 그건 내 팔자소관 아니겠어요?

 

 

 

 

아이러니하게도 언제 누군가의 칼날에 죽어갈지 모르는 비운의 武士들이 오히려 그 죽음의 향연을 즐겼단다.

그래서 투구 속에 귀한 향을 넣어 제 목이 떨어지는 순간 그 진동하는 향기로 살아남은 적에게 더 큰 승리의 도취감을 선사했단다.

그렇다면! 저 푸르고 질긴 잎으로 무장한 동백 한 그루. 그도 이미 그 붉은 투구 속에 향기로운 죽음을 준비했던 걸까?

그래서 허공을 가르는 한 줄기 바람 앞에 저렇듯 모가지 댕겅 떨구며 낭자한 향기 콸콸 쏟아내는 걸까?

그리하여 승승장구하여 달려 온 봄에게 더 큰 희열 만끽하게 하도록!
<박이화 '겨울 동백'>

 

 

 

 

풍수지리에 능했던 도선국사가 좌청룡 우백호 사이 물이 빠져 나가는 기운을 막고자

옥룡사 주변일대에 화재에 강한 동백나무 숲을 조성했다지요. 남아있는 나무들만 대략 7천 여 그루.

 

 

 

 

도선국사가 35년 동안 머물면서 수백명의 제자를 가르치다 입적했다는 옥룡사.

‘옥룡’이라는 지명은 도선의 도호인 ‘옥룡자’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지는군요.

 

 

 

 

동백 숲 아래 숨어들듯 피어있는 산자고.

때로는 주연보다 빛나는 조연이 있는 법이지요.

 

 

 

 

아름드리 나무에서 뚝뚝 떨어져내린 동백의 눈물.

 

 

 

 

광양에서 하동으로 넘어가는 길, 짙은 연무 속으로 섬진강은 유장하게도 흘러갑니다.

가로변의 벚꽃들이 구름처럼 몽글몽글 피어올랐군요.

 

 

 

 

한 며칠 이렇게 화들짝 피고 말려고, 그 긴긴 날을 우두커니 서 있었는지.

 

 

 

 

형제봉 아래 깃든 토담농가에 들렀지요. 봄에는 차잎을 따서 황차로 발효시키고, 가을엔 우리콩으로 된장을 만들어 팔지요.

십여년동안 민박집을 하던 두 내외는 요즘 '뒹굴뒹굴책방'을 만들었어요.

누구라도 와서 하루종일 책이나 읽고 뒹굴뒹굴 놀다 가라고 만든 공간이랍니다.

 

 

 

 

거실에도 서가, 방에도 서가... 1층 전부를 책으로 둘러쌓을 작정이군요.

창작과비평, 실천문학, 이런 류의 책들이 주인의 성향을 단박 알아보게 하더군요.

 

 

 

 

토담농가에서 만든 황차 '눈정'에 살구꽃 한장 띄워 마셨지요.

"살구 하나 덜 따면 되지요 뭐~" 안주인의 얼굴이, 말씨가 살구꽃처럼 은은하고 이뻤습니다.

 

 

 

 

오십대 중반에 문학을 공부하는 토담님이 학교 강의중에 부랴부랴 집으로 오셨습니다.

사람 좋아하는 뜰에봄이 토담님을 붙잡고(?) 조씨고택 안내를 부탁했지요. 역시 대단한 친화력!

 

 

 

 

박경리가 '토지'를 쓰게 된 모티브가 되었던 하동 조씨고택. 높다란 다락방에 올라 석양을 보았지요.

부림홍씨 양반댁 여인네 둘이 팔순의 할아버지 앞에 단정하게 무릎을 꿇더군요.

삽시간에 조신 모드로 돌입한 두 친구를 보면서 진주 강가 쇤네는 '어매, 기 죽어!' 했습니다.

 

 

 

 

내가 본 한옥 중 가장 아름다운 집입니다. 정겨운 흙담도 그렇고 낡은채로 그대로 둔 집도 그렇고

조선 최고의 명당에 지었다는 구례 운조루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습니다.

 

 

 

 

고대광실을 지키며 혼자 기거하던 어른이 얼마나 사람이 그리웠는지 손을 붙잡고 방으로 잡아끌더군요.

"술 한잔 하고 가~ 얘기 좀 하고 가~"

운동장같은 안채는 비워두고 하인들이 살던 아래채 방 한칸에서 숙식하는 어른을 보고 콧등이 시큰하더군요.

 

 

 

 

어르신, 다음에 올 땐 시간 넉넉히 내어 하루종일 말동무 해드릴게요.

나물 무치고 찌개 끓여 어르신 밥이나 한끼 해드리고 싶네요.

 

 

 

 

평사리 들판은 여전히 넉넉합니다. 저 멀리 사진사들의 단골 모델 <길상이와 서희 나무>가 서 있군요.

"저건 길상이와 서희가 아니라 용이와 월선이라 캐야 맞는다." 깃님이 기어이 한 소리를 하네요.

소설 '토지'에서 길상이와 서희는 멀리서 바라보는 사이라 저렇게 가깝지 않다는 거지요 ㅎㅎ

 

 

 

 

무엇엔가 인생을 걸어보는 것도 좋겠지만 사람을 얻는 것처럼 큰 재산도 없다 싶네요.

반환점을 돌아온 인생길에 함께 여행할 수 있는 친구를 둔 것도 큰 복이지요.

 

 

 

 

아침부터 바지락까는 여인들. 오늘날의 한국을 만들어낸 어머니들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적에게 들키지 않게 거북선을 숨겨 두었다는 사천 대방진굴항입니다.

고목 그림자의 반영이 깜짝 놀랄만큼 아름답더군요.

 

 

 

 

사천에서 하룻밤을 묵은 사연을 쓰려니 손가락 힘이 모자랍니다.

공군사택을 개조한 1만원짜리 숙소가 별 다섯개짜리 호텔이 부럽지 않았다는 사실만 밝히면서... ^^*

 

 

 

 

이제 남해로 들어섭니다. 해안선을 따라 곳곳에 이런 풍경입니다.

 

 

 

 

다랭이논 뒤로 설흘산 암릉이 멋드러집니다.

 

 

 

 

유채꽃이 흐드러진 해안가 저 길에 '바래길'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더군요.

사진 구도가 멋지게 나올만한 자리에 유채를 심고 전망대도 세웠더군요.

 

 

 

 

그러니 곳곳에서 이런 장면을 만나지요.

 

 

 

 

그러나 정작 우리의 관심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죠.

다랭이마을 폐교에 홀딱 반한 친구들, 서로 이 집에 와서 살겠답니다.

 

 

 

 

무너지고 깨어진 건물에서 친구들이 본 건 무엇일까요?

벚꽃 낭자하게 핀 학교 운동장에서 공기놀이하던 유년이 그리웠던 것만은 아닐 겁니다.

 

 

 

 

깨어진 유리창에도 봄은 오는가!

 

 

출처 : 지우당(地旴堂)
글쓴이 : 지우당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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