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종합과 결론
1) 종합(새로운 메트릭스를 찾기 위한 준비)
본 평론은 사랑의 정황을 주목, 편견과 환상, 합일에의 열망, 고통, 죽음, 분노라는 여섯 가지 주요한 정서로서 정의했다. 그리고 2000년 인문주의의 역사에서 정의된 에로스, 필리아, 스토르게, 아가페, 루두스, 마니아, 프라그마, 크러쉬, 포르노, 호모, 플라토닉러브, 아가페테라는 12가지의 사랑의 형태를 정리했다. 그리고 여섯 가지 정황과 12가지의 사랑을 종횡으로 놓고 정황별 사랑을 매트릭스로서 연결시켜 보았다. 그 결과 사랑에 관하여 몇 가지 의미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①12가지의 사랑은 6가지 정황이 변함에 따라 고유의 성격을 잃고 다른 사랑으로 바꾸어지는, 사랑의 가역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②아가페 사랑이 인간의 기본적인 사랑으로서의 에로스 사랑과는 전혀 접점이 없다는 인본주의적 사고방식은 성경에 내용에 의하여 잘못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성경의 진술을 통해 아가페 사랑은 인간의 남녀끼리 행하는 여섯 가지 사랑의 정황을 온전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③아가페 사랑은 인문주의적 사고방식에서는 에로스 사랑가 접점이 없는 것으로 주장되었다. 그러나 성경의 내용은 아가페 사랑의 정황이 에로스 사랑의 정황과 일치함을 증명한다. 이 상반된 두 가지 결론은 아가페 사랑이 모든 사랑의 정황에 대해 ○으로 처리할 수도 있고 ×으로도 처리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즉 아가페 사랑은 모든 사랑의 속성을 다 가지는 특별한 사랑의 형태임을 알 수 있다.
④사랑의 매트릭스에서 아가페 사랑에 대한 정황적 설명을 잘못했을 때 그 결론 유도도 당연히 오류가 발생한다. 이는 오늘날 현대 학문에서도 방법론적 문제점이 항상 내포되어 있을 것으로 유추 할 수 있었다.
⑤벽돌은 모든 건축물을 수치화시킬 수 있게 하며 정보의 기초단위가 된다. 매트릭스 분석도 행렬이 교점에서 늘 정보가 발생한다는 점에서 벽돌과 유사한 성격을 갖는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벽돌 건축의 창시자인 니므롯이 하나님에게 대항했듯이 현대 모든 학문이 과학이라는 이름아래 모두 하나님을 부정하고 대항한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가진다.
⑥플라톤의 “향연”에서 에로스 사랑이 거론된 후 오늘날 까지 수많은 사랑의 논의가 전개되었다. 그중에서 중세 이후의 인물로서 사랑에 관한 이론으로서 가장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 프로이드, 에리히 프롬, 루이스의 의견을 살펴보았으나 모두가 제한적 설명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뿐, 사랑에 대한 분명한 규명에는 이르지 못했음을 지적할 수 있었다.
⑦오늘날의 지지를 얻는 것은 사랑의 원천을 인간의 특정한 뇌에서 이루어지는 활동과 호르몬의 분비작용에서 찾는 생화학적 반으로서의 사랑의 이론이다. 그 내용은 결국 인간의 사랑을 종족 보전의 목적 외에는 큰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귀착한다. 또 그 사랑의 기간도 3년 정도도 한정시키고 있다. 이는 사랑이 전 인생에 걸치는 파급효과와 의미를 무시한다. 뿐 만 아니라 가족사랑으로 전화하고 옮겨가는 사랑의 가역성도 고려하지 않는다. 이 이론은 그야말로 사랑을 생리학의 단순한 증상이상으로는 해석하지 않는 , 도저히 인문학에서는 채택할 수 없는 졸속한 이론이 되고 있다.
2) 결론(새로운 메트릭스에 이르는 길)
이제 우리는 기존의 메트릭스를 수정해 가는 과정을 통하여 사랑의 본질 규명을 시도한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기존의 메트릭스를 행렬적으로 조정하여 사랑의 본질을 규명할 새로운 메트릭스에 이르고자한다. 그리고 그 새로운 매트릭스가 사랑의 본질을 설명해 줄 것이다.
(1)모든 사랑은 에로스 사랑으로 치환된다. 그러나 아가페 사랑으로는 치환될 수 없다.
사랑은 유동적이며 가역성을 지니기 때문에 정황이 바뀌면 다른 사랑으로 전환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모든 사랑은 에로스 사랑으로 치환될 수 있다. 그러나 에로스 사랑이 이론적으로는 아가페 사랑으로 치환할 수 있다 할지라도 과연 현실에서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에로스사랑이 아가페 사랑과 일치하기 위해서는 주목, 환상, 합일, 고통, 죽음, 분노가 모두 부정되거나 초월하면 아가페 사랑으로 전환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남 녀 간의 낭만적인 사랑이 주목, 환상, 합일, 고통, 죽음, 분노라는 조건에서 모두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언제일까. 모든 상황을 다 고려해보아도 에로스 사랑의 모든 정황이 부정되는 것은 죽음으로 인해 인간자체가 소멸할 때 외에 다른 방법은 생각할 수 없다. . 즉 우리 인간의 사랑은 현실에서는 에로스 사랑에서 벗어나서 아가페 사랑으로 치환이 불가능하다.
(2)에로스 사랑은 아가페 사랑으로 치환할 수 없다. 그러나 아가페 사랑은 에로스 사랑으로 치환할 수 있다.
아가페 사랑은 인본주의적 사고방식에서는 에로스 사랑의 정황을 만족시킬 수 없지만 성경은 분명히 아가페 사랑은 에로스 사랑과 동일한 정황을 가진다고 이야기한다. 아가페 사랑은 에로스 사랑으로 언제든지 치환이 가능한 것이다. 즉 에로스 사랑을 비롯한 모든 사랑은 아가페 사랑에 대해서는 불가역성을, 아가페 사랑은 모든 사랑에 대해서 가역성을 지님을 알 수 있었다.
(3)모든 사랑은 사랑의 스펙트럼에 포함된다. 그러나 아가페 사랑은 사랑의 스펙트럼에 포함되지 않는다.
인본주의자들이 설정한 사랑의 12가지 분류는 아가페 사랑도 그 분류에서 1/12의 점유율을 가지는 것으로 상정한다. 그러나 앞에서의 논의에서 아가페 사랑은 에로스 사랑에 대해 ○표로서 일치하는 성질(성경)과 ×표로서 완전히 불일치하는 성질(인본주의)을 동시에 가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즉 아가페 사랑은 사랑의 정황이 가지는 ○표와 ×표를 다 가지는 사랑임이 확인되었다. 이 사실은 아가페 사랑은 나머지 11가지 사랑의 모든 속성을 다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아가페 사랑은 다른 모든 사랑의 성질을 다 가지고 다른 사랑은 아가페 사랑만큼의 속성을 가지지 못한다고 할 때 아가페사랑은 이미 1/12이 아니다. 1/12가 아닌 아가페 사랑은 이제 다른 사랑과 병렬적으로, 대등하게 놓을 수 없게 된다. 이는 아가페 사랑은 다른 사랑과 전혀 성질이 다른, 더 큰 무엇임을 암시하고 있다.
(4)전체 집합으로서의 아가페 사랑(모든 사랑의 모체로서의 아가페 사랑)
아가페 사랑은 모든 사랑에 접근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랑은 아가페 사랑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아가페 사랑은 사랑의 스펙트럼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은 또 무슨 의미인가. 그리고 이 두 의미를 합치면 어떤 의미가 되는가. 모든 것을 포함하나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은 수학의 집합론을 빌어 말하자면 아가페 사랑은 모든 사랑에 대해 여집합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또한 그것은 모든 사랑의 집합이 아가페 사랑의 집합 안에 있다는 뜻도 된다. 이 수학 집합은 결국 모든 사랑은 아가페 사랑이라는 전체집합의 부분집합이라는 결론에 귀착된다. 이는 모든 사랑이 아가페 사랑에서 파생된 존재임을 반증하고 있다. .
(5) 아가페 사랑의 두 가지 측면(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①인간의 삶에 대응하는 아가페 사랑
모든 사랑은 아가페 사랑이라는 어머니 사랑(모체)에서 출발한다.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행하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인간의 삶에 대응하는 사랑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의 죽음에 대응하는 사랑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삶을 위해 베푸시는 사랑은 낮과 밤, 태양과 구름 비와 바람, 계절과 수확...이런 것들로 나타난다. 즉 세상의 온갖 물상으로 나타난다.
②인간의 죽음에 대응하는 아가페 사랑
다음은 인간의 죽음에 대응하는 하나님 사랑이다. 사랑의 반대말은 죽음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죽음이다. 생로병사는 순리인가. 생로병사는 당연한 귀결이며 이것이 진리인가. 우리는 이것을 자연의 이치라 부르며 순리임을 의심하지않는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생로병사는 순리가 아니라 역리이며 그것도 매우 악질적인 역리이다.
왜 그런가. 순리와 역리의 판단이 왜 이렇게 우리의 일반적인 합의 내용과는 다르게 나타나는 것일까. 이는 자연에서 이루어지는 현상은 무조건 진리이며 순리로 해석하는 인간 인식의 제한성 때문에 발생한다. 그것은 마치 비행기가 하늘을 날기이전에는 인간이 하늘을 난다는 것은 무저건 부조리이며 역리라는 보았던 인류의 과거행태를 보면 이 사실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모든 상상은 다 이루어진다. 인간이 상상하는 모든 것은 사실 다 이루어진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 상상이 현실에서 이루어 지기 전까지는 항상 그런일이 일어나는 것은 부조리이며 역리로서 불가능하다고 본다.
존재와 소멸은 어느것이 순리이며 조리인가. 이 우주에 존재하는 가장 큰 부조리가 생로병사라는 죽음의 순환고리이다. 죽음은 조리가 아니다. 탄생한 어떤 존재도 소멸해서는 안 되는 것이 조리이며 순리이다. 존재는 존재의 항속성을 가질 때 조리이다. 존재가 항속성을 잃고 느닷없이 소멸되면 그건 부조리이다. 이것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잘 읽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데아가 아닌 현실 세계에서는 어떤 것도 항존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부조리이며 역리라는 것을 인간은 꿈에도 생각을 못하는 것이다.
죽음은 존재를 소멸시킨다. 존재의 항존성을 무너뜨리는 죽음은 부조리인것이다. 그리고 현실의 인간은 죽음이라는 우주적 부조리 앞에 직면해 있다. 인간은 이것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받아들인다. 왜 이렇게 되었나를 따지러 들질 않는다.
인간은 운명처럼 이 부조리를 받아들이고 기껏 이 부조리에서 위로받기 위해 실존주의 철학을 만들고 별별 종교를 다 만들면서 스스로를 달래며 태연한 척 한다. 그러나 속으로는 늘 이 부조리가 자기에게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닥칠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살고 있다. 그리고 이 부조리 앞에 엎드리고 무릎 꿇으며 경배하는 초라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
죽음은 인간의 삶의 중간에 끼어 든, 매우 엉뚱하며 낯선 존재이다. 죽음은 본래는 인간의 삶에 간섭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떤 사건으로 인하여 죽음이 느닷없이 인간의 삶에 끼어든 것이다. 부조리가 발생한 것이다.
사랑의 반대말이 죽음이라면 하나님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아마도 부조리 쯤 될 수 있을 것 같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유일하게 능치 못하시는 일이 한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부조리 위에는 서시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과 부조리는 동행하거나 양립할 수 없는 관계이다..
죽음이 조리라고 믿는 인간을 보시는 하나님은 괴로우셨을 것이다. 이 쉬운 문제를 도무지 풀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은 정답을 슬쩍 알려주시기에 이른다. 그것은 2000쯤 전에 유대 땅 이스라엘에서 한 특별한 사건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직접 나타나신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죽고 살아나심으로서 죽음이 부조리라는 사실을 증명하셨다. 그리고 홀연히 사라지셨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크게는 두 번 나타나셨다. 아담에게 나타나셔서 선악과는 부조리이니 따먹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따 먹음으로 부조리를 택했다. 하나님은 다시 나타나셨다. 선악과가 가져온 부조리를 피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많은 인간들은 여전히 부조리를 선택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라는 조리를 늘 부조리를 선택하는 데 사용한다. 자유한 인간은 늘 아가페 사랑을 저버리는 것이다.
①단일 행과 무한대의 열로 이루어진 새로운 사랑의 매트릭스
지금까지의 논의를 합치면 아가페 사랑이 사랑이 어머니처럼 모든 사랑을 잉태한 장본인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제는 이 세상의 모든 자연의 물상이 인간을 삶을 위해 하나님이 베푸신 아가페 사랑의 정황이라는 결론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되었다. 모든 물상이 사랑이라는 것은 온 셰계가 사랑의 정황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속에 고기가 물이라는 정황을 벗어날 수 없듯이 인간은 사랑이라는 정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말은 사랑의 메트릭스에서 행을 이루는 12가지 분류의 사랑은 모두 아가페 사랑으로 귀결되며 열을 이루는 6가지 사랑의 정황들은 무한대로 확장된다는 뜻이다. 이것이 사랑의 새로운 매트릭스이다. 한 가지 사랑만이 있고 무한대의 정황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사랑에서 무한대의 사랑의 정황이 도출된다는 의미이다. 그 사랑에서 지하수가 솟아나오듯 엄청난 사랑의 정황, 즉 세상의 온갖 물상들이 쏟아져 나온다는 의미이다.
고기가 물을 규명하려는 시도는 고기를 둘러싼 전 우주를 규명하려는 시도와도 같다. 고기가 물을 알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이다. 인간이 사랑을 알면 모든 세계와 우주를 다 아는 것이다. 답은 간단하다. 고기는 "온 세상이 물이다!" 이렇게 외치면 정답이 된다. 우리는 "온 세상이 사랑이다!" 이렇게 외치면 딩동댕!, 또는 빙고! 즉 정답이 된다.
②사랑에 대한 새로운 지평
우리는 꽃이 피었을 때 “아름답다!” 할 것이 아니라 “사랑이다!”라고 먼저 외쳐야한다. 모든 정황이 다 사랑이기 때문이다. 아침이 밝아 오는 것은 해가 뜨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이 뜨기 때문에 밝아오는 것이다. 폭풍우는 인간에게서는 가장 공포스럽고 위대한 자연의 물상(物像)이지만 그것도 사랑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선 멈추어야한다. 세상을 사랑 외의 것으로 파악하지 말아야한다. 매트릭스분석을 멈추어야한다. 열을 이루는 무한대의 정황을 다 나열할 수 없기 때문이다. 6가지 사랑의 정황, 12가지 사랑의 분류...모두가 어처구니 없는 분석이었다. 이제 다 알지 않았는가 모든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무한대인 사랑을 누가 독점하겠는가. 분석한다고 무한대인 사랑을 누가 더 가질 수 있겠는가. 사랑에 대해 더 안다고 해서 사랑을 사고 팔 수가 있겠는가. 고기가 어찌 물을 사고 팔겠는가. 고기에게 물이 생명이듯이 인간에게는 사랑이 생명이다. 사랑의 반대말은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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