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강주막을 나와 곧장 하회마을로 왔다.
점심 때가 되었는데 점심으로 기왕에 이름난 향토음식 용궁순대집에 들러서 먹을 걸....
그냥 지나쳐 와서는 하회마을에 있는 음식점에서 안동 간고등어 정식과 콩국수, 산채 비빔밥을 먹었다.
안동간고등어 정식은 1인분에 만원으로 두 사람 이상만 주문을 받는다고 했다.
두 사람 앞에 고등어 한 마리를 구워 주는데 고등어도 내가 시켜먹는 여수 고등어 보다 훨씬
맛없고, 맡반찬도 부실해서 시켜 먹을 것이 못 된다고 입을 모았다. 비빔밥과 콩국수는 그런대로 괜찮았네

입구에 있는 에리자베스II 세 영국여왕 방문기념 전시관 입구에 있는 여왕 사진

마침 여왕님 생일이어서 이렇게 생일상을 차렸다고 한다.
예전에 혼사를 치루고, 사돈이 딸을 데려다 주러 오면 그 사돈 손님을 '큰손'이라 하며
저만큼은 택도 없지만 하여튼 교자상 가득 저 비슷하게 음식을 차리던 기억이 난다.
우리 엄마는 상 오른쪽 도미처럼 생선에 고명 얹어 꾸미는 거며 음식을 잘 하셔서 어느 집에 큰손이 온다고 하면 불려 가셨다.

떡을 꽃처럼 만들어 나무 모형에 매 달았았다. 그 보다는 문어를 공작모양으로 오린 것이 기막히다.

입구엔 여전히 장승들이 널부러져 있고...


참으로 평화로운 풍경이다.
시간이 지난 날로 되돌려진 듯한 느낌이다.

연밭에 피어 있는 연꽃 모습이 마치 흰 새들이 앉아 있는 것 같다.

헛간앞에 핀 참나리꽃이 주변 분위기와 기막힌 조화를 이룬다,

삼잎국화가 흐드러지고, 봉숭아가 피어 있는 저 집은 예전에 소휘와 같이
마당까지 밟아 봤던 집 같다, 그땐 지붕에 박이 영글어가고, 마당엔 고추가 널려 있었다.




저 집 할매가 시집 올 때 타고 오셨다는 가마.

몇 년 전 (2009년) 에 소휘랑 같이 왔을 때 이 집 할매가 저 마루에 앉아 고구마 줄기를 까고 계셨는데
할매 대신 베틀이 놀여있다. 할무이는 어디 가셨을꼬?

그때 그 할무이 시집 올 때 이야기 하시면서 저리 밝게 웃으셨는데...



은행잎이 황금빛으로 물 들 철엔 저 가로등에 불 밝히지 않아도 되리~

충효당






이 집은 탈렌트 류시원씨 고향집이라고 했다.
내 친구 해개이는 류시원이 양반 자손이라 하마 생긴 거 부터 반티가 잘잘 난다고 했는데
뺀질이 같다고 보면 또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 ㅎㅎ....그래서 선입견을 무시할 수 없는 거다.

지붕에는 와송이 빽빽하다.

하회마을 다운 간판(?)이다.

하회마을 중앙에 있는 삼신나무, 600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나무 둘레에 매달려 있는 것은 소원을 적은 쪽지이다, 나무가 저 소원을 다 들어주자면 얼마나 신경을 써야 할까?


「양진당(養眞堂)」은 풍산 류(柳)씨의 대종가(大宗家)이다. 사랑채에 걸려있는 「입암고택(立巖古宅)」현판은 겸암 류운룡(柳雲龍, 1539~1573)선생의 부친인 입암(立巖) 류중영(柳仲영, 1515~1573) 선생을 지칭한다. 당호인 「양진당(養眞堂)」은 겸암 선생의 6대 자손인 류영(柳泳, 1687~1761)공의 아호(雅號)에서 유래하였다.

하회마을 행사의 하나로 오후 4시면 불천위 제사를 지낸다고 하길래 기다렸다가 제사 지내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마루가 좁아 25 명만 정해서 볼 수 있게 했다.

불천위 제사 상에 올리는 고기는 익히지 않은 생물 (날 것)이 오르는데 그것은 불천위에 향사된 선조는
인간으로 보지않고 신과 동격으로 보기 때문이란다.


푸르스름한 도포를 입은 아저씨의 검은 양복바지가 분위기를 다 깬다 .

제사밥도 나누어 주길래 얻어 먹고 왔다.
물론 남자들은 일찌감치 가 버린 상황.




저런 집 한 칸 차지하고 살면서 마당에 봉숭아도 심고, 채송화, 분꽃 , 맨드라미. 당국화도 심고...그랬으면 좋겠다.


언제 다시 오게 되면 저 건너편까지 가 봐야겠다. 그땐 누구하고 올까? (남편은 제외순위 첫 번째.)
남편은 십 년 전에 와 봤다나 어쨌다나 그러면서 우리가 불천위 제사까지 참석하며 하회마을을 돌아 볼 동안
주차장에서 기다렸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이 잉간아. 우째 그리 호기심도 없냐? ㅉㅉ....' ~ 내가 이렇게 대놓고
말 한 건 아니고 속으로만 그랬다는.....

하회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병산서원으로 갔다.
생각해보니 병산서원에 지금 한창 배롱나무 꽃 필 때이고, 또 바로 지척인데 당근 가 봐야재.
역시나 병산서원엔 배롱나무꽃이 한창 이뿌게 피어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마당님 과 나무새님, 배꽃,소휘와 함께 병산서원에 왔을 때 그 감동을 어찌 다 말하리.
그때는 팔월 말 경이었는데도 배롱나무 꽃이 피어 있었다. 하기사 저 꽃은 하도 오래 핀다고 하여 백일홍이란 또 다른
이름도 있지 않은가.


예전에 왔을 때 이 연못엔 배롱나무 꽃잎이 가득 떨어져 있었는데 ,,,아직은 낙화할 때가 아닌갑다.


종이에 먹펜, 41X58cm, 2011

만대루엔 이제 오르지 못하도록 출입금지 팻말을 붙여 놓았다.
비오는 날 만대루에서 병산과 그 아래를 흐르는 낙동강물을 바라보며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수 소리를 듣는 것이
압권이라 했건만 아쉽다.
지난 봄 탐매여행 때 매화가 만발했던 매화나무는 이제 푸른 잎으로 뒤덮혀있다.




원래 똑딱이로 막샷인 솜씨에 저녁 때가 된 데다가 비까지 내려 사진이 영 거시기 하다만 배롱나무가 저렇게 크구나 ~
짐작이나 하시라꼬 서비스 차원에서 올리는 것임.

지난 봄 달팽이 화장실 뒤 매화꽃도 눈부셨는데 지금은 배롱나무 꽃이 대신하고 있다.

통시






굽고 휘어진 나무들의 완벽한 조화, 그게 병산서원이다
[중앙일보] 입력 2011.06.09 01:10 / 수정 2011.06.22 14:49
일본 유명 건축가 구로가와 마사유키, 이상해 교수와 안동에 가다
병산서원의 누마루인 만대루(晩待樓). 정면 일곱 칸, 측면 두 칸짜리의 큰 규모로 앞쪽으로 병산과 낙동강을 낀 자연이 펼쳐진다. 병산서원은 강산의 경관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며 탁월하게 배치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중앙포토]“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원, 한국 건축사의 백미.”(유홍준·명지대 교수) “건축가들의 영원한 텍스트.”(김봉렬·서울대교수)” “자연과 인문학이 결합한 공간.”(황두진·건축가)
경북 안동시 병산서원에 대한 예찬은 뜨겁다. 한국 건축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전통 건축물의 하나로 꼽힌다. 건축과 자연의 만남이 조화롭다. 일본 건축가 구로가와 마사유키(74)가 지난 주말 이곳을 찾았다. 건축설계뿐 아니라 자기 이름을 단 의자와 테이블 등 디자이너로 유명한 그다. 일본 신현대미술관 설계자인 구로가와 키쇼(1934~2007)의 동생이다.
그는 국민대 동양문화디자인연구소(소장 최경란)가 주최한 한·중·일 디자인 컨퍼런스에 참석해 2박 3일간 하회마을·양동마을·봉정사·불국사 등을 돌아봤다. 그는 특히 “병산서원이야말로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의 공존을 강조한 동아시아 문화의 가치가 응축된 곳”이라고 감탄했다. 그와 답사 해설을 맡은 건축학자 이상해(성균관대) 교수를 만났다.
◆“건축물 자체가 가르침”
이상해 교수(왼쪽)와 일본 건축가 구로가와. 구로가와는 서원에 들어서면서부터 탄사를 터뜨렸다. 만대루에 앉아 서원 앞 병산과 낙동강을 바라보면서 한동안 침묵했다. “얘기는 들었지만, 실제 와보니 정말 감동이다.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컨퍼런스의 주제가 ‘흙과 바람’인데, 흙의 느낌이 강하게 느껴지는 곳이다”고 했다.
-왜 흙인가.
“우리를 키워주는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곳이라는 뜻이다. 건축물 자체가 학생들에게 가르침이 되는 것 같다.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도 놀랍지만, 나무를 쓴 방식에서도 가르침이 읽혀진다.”
-어떤 가르침인가.
“기둥부터 들보까지 모든 목재들은 자연의 그대로의 모습이다. 굽고 휘어진 것 등을 잘라내지 않고 하나하나의 개성을 존중해 배치했다. 각 나무의 개성을 살렸는데도 균형이 살아있고,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획일성은 우주의 섭리를 거스르는 것이다. 그 답을 보는 것 같다. 각기 다른 개성이 사회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지를 말없이 가르쳐주고 있다.”
-일본 건축과 비교한다면.
“다른 점보다 닮은 점이 크게 보인다. 지금 보니 한국 건축이 일본 건축의 스승임을 알 수 있었다. 일본 건축양식 중에서 소박함과 자연스러움을 중시하는 스키야 양식은 조선의 영향을 받은 뒤 발전시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주목했나.
“흙과 바람이 서로 다른 게 아니라는 점을 느끼게 됐다. 바람이 건축물을 돌고, 통과하며 풍요로운 곳을 만들어냈다. 나는 항상 바람이 되고 싶었는데, 이곳에서라면 충분히 (바람이) 될 수 있겠다.” (웃음)
◆“자연과 하나되는 이상적 공간” 이 교수는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유학에서 의미하는 최고의 정신상태, 즉 자연과 하나되는 되는 상태에 이르고자 했다”며 “병산서원은 유교건축의 이상을 담아낸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병산서원을 제대로 보려면.
“한국 건축은 바깥에서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다.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게 중요하다. 입교당 대청 한가운데 앉아 만대루가 들어선 앞쪽을 바라보면 만대루 이층 일곱 칸 기둥 사이로 강물과 병산과 하늘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또 만대루에서 바깥을 내다보면 자연 가운데에 묻혀 있는 느낌을 갖게 된다. 자연과 하나가 된 극적인 느낌을 주는 절묘한 공간배치다.”
-극적인 느낌을 끌어내는 요소는.
“입교당과 만대루의 높이, 밖을 바라보는 사람의 눈높이를 주목할 만하다. 경관을 제대로 보려면 보는 이가 자세를 계속 바꾸어야 한다. 눈높이에 따라 하늘과 산, 강물이 다 보이기도 하고, 강물이 보이지 않는 등 각기 다른 풍경이 보인다. 당시 건축가 역할을 한 목수가 경관의 프레임에 대해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는지 엿볼 수 있다. 안에서 밖을 바라볼 때 산봉우리를 정면으로 보이게 짓지 않고 7~8부 능선이 보이도록 짓는 것도 한국 건축의 특징이다.”
-경관의 프레임이라고 했다.
“목수가 만대루 누각의 양끝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도 자세히 들여다보라. 입교당에서 바라볼 때 시야가 확 트이도록 하기 위해 만대루 끝을 좌우로 길게 펼쳤다는 것이다.”
안동=이은주 기자
◆병산서원(屛山書院)=서애(西厓) 유성룡(1542~1607)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곳. 원래 풍악서당으로 풍산 유씨의 교육기관이었는데, 유성룡이 선조 5년(1572)에 현재의 자리인 경북 안동시 병산리로 옮겼다. 광해군 6년(1614)에 존덕사를 세워 그의 위패를 모시고, 1629년 그의 셋째 아들 유진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다. 건물로는 위패를 모신 존덕사와 강당인 입교당, 유물을 보관하는 장판각, 기숙사였던 동·서재, 신문, 전사청, 만대루, 고직사가 있다. 사적 제26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