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때가 있다거나, 죽고 난후 내세가 있다거나, 지천명으로 생명과 죽음이 하늘에 달렸다거나, 죽어도 환생한다거나 윤회한다거나...죽음에는 많은 경구들이 존재한다. 모두가 하늘의 이치들이다. 그러나 이런 하늘 이치들에 대해서 인간이 깨닫고 믿기에는 그 이치가 너무 멀고 요원하다. 그러나 죽음에 직면하면 단지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해 진다. 사람의 일이 허무하다는 것...인생이 덧없다는 것, 사람의 행사(行事)가 너무 무의미하며 그 존재가 가볍다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이 긴 문장들을 밀양의 유림 경운 박노협 선생은 다음과 같이 두 문장으로 압축하여 전한다.
未信天理之長遠(미신천리지장원)
始覺人事之荒凉矣(시각인사지황량의)
하늘의 이치가 길고 멀다는 말은 믿지 못하겠으나,
사람의 일이 허무하다는 것은 비로소 깨달아 알았다네..
-구름 속에 밭을 갈며-경운 박노협(114P)
---------------------------------------------------------------
지금 쓰는 이 연가는 죽음에 대하여(2)라는 부제가 붙여져 있다. 이 연가는 머나먼 연가(35)편에서 다루는 죽음의 문제, 그 연장선상에 있다.
K가 발설하는 여러 가지 돌발변수들로 인해 좌충우돌하던 뮤트는 건강이 나빠졌고 항우울성 신경제를 다시 복용하기 시작한다. 그 신경안정제들은 점차 뮤트에 몸에 축척되었으며 하루종일 몽환적 상태가 그를 엄습했다. 이렇게 졸리며 몽롱한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질투라던가 분노, 후회 등의 심란한 의식에 의해 그의 뇌리는 늘 잠들지 못했다. 어느 날 뮤트는 다시 지인과 함께 술을 폭음하다가 신경안정제와 알코올의 상승작용으로 인해 다시 혼수상태에 빠져 구급차에 실리는 신세가 된다. 똑 같은 증상으로 두 번째 당하는 변이었다.
다음 글은 뮤트가 다시 죽음에 처한 상황과 이전의 상황을 비교하기 위하여 연가 35편의 글 일부를 발췌해 본 것이다.
정신이 아득해 지며 뮤트는 드디어 죽음이 왔다고 생각했다. 뮤트가 죽음에 직면하여 느낀 특별한 감정,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두려움이었다. 뮤트가 경험한 죽음에 대한 느낌은 두려움으로 시작해서 두려움으로 끝나고 있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이 두려움은 처음에 밤톨만큼 시작하여 구급차가 병원에 접근할수록 눈덩이처럼 커져갔으며 병원에 도착해서는 뮤트는 완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뮤트는 그 초급한 와중에서도 또 생각한다.
“왜 이렇게 두려울까. 왜 너는 두려워하는 것인가?”하고 끝없이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이제 이 지겹고 암울한 세상의 감옥에서 벗어나 편안하게 쉬면 그만인데 도대체 너는
왜, 무었을 두려워하는 가” 하고 끝없이 자신에게 반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초급한 순간에도 뮤트는 합리적인 생각과 근거로서 자신을 설득하고 두려움을 물리치고자 하였다. 그러나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뮤트는 심전도 검사를 위해 침대에 실려 급히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두려움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었고 그 와중에서도 뮤트는 힐끗 “아내에게 미안하다.”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자식은 생각나지 않았다. 단지 그 동안 아내에게 잘못했다는 오직 한 가지 회환이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 올랐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연인 중 한사람이 죽으면서 “사랑했다고 전해 주세요”라며 유언을 남기며 숨을 거두는 장면을 희미한 미소로 하잖게 여기던 뮤트였다. 그러나 이제 그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단지 유언이 있다면 사랑한단 말 대신에 “아내에게 그동안 많이 잘못했다고 수도 없이 말하며 죽었다고 전해주세요”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말을 전할 사람이 그 병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술 마시던 동료는 심전도 검사실 밖에 있었고 간호원에게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뮤트는 간호원에게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내 손을 좀 잡아주시요”라고..그것은 다른 뜻이 있는 게 아니라 산 사람의 손을 잡고 있으면 그 연결고리로 말미암아 죽음이 뮤트를 이승에서 갈라놓지 못하게 하려는 뮤트의 절박한 구조요청이었던 것이다.
뮤트는 어쨌든 그 때 죽지 않았다.
그가 다시 집에서 요양을 시작했을 때 뮤트는 참담해 하고 있었다.
뮤트가 죽음 앞에 직면했을 때 수많은 영웅들이 죽음 앞에서 보였던 그 담백하고 깨끗한 모습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자살을 생각한 주제에 사고사나 자연사 앞에서 그렇게 덜덜 떤다는 것은 모순이었다. 그는 자살에 대한 구상만 했지 실제 상황이 벌어지면 절대 죽을 인간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비겁하고 더러운 인간!” 뮤트는 어이없이 자신을 자학하고 있었다.
너무 갑자기 당한 상황이었으므로 그런 옹졸한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어쩌면 죽음은 연습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 앞에서 느낀 그 두려움의 실체에 대해서 뮤트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냥 그 죽음의 동굴에서 역사 속에서 앞 서 죽어간 셀 수도 없이 많은 인간들처럼 그냥 그렇게 편안히 잠들면 되는 것이었다. 응급실에 간 것은 죽음의 입구, 편안한 죽음이 예비 된 막힌 동굴의 입구에 불과했는데...
뮤트여!.. 그대는 왜 두려워하는가.
-머나먼 연가(35):죽음에 대하여(1)-막힌 동굴의 입구- 중에서
위 글은 머나먼 연가 35편에 죽음 체험에 대한 글이다. 당시 뮤트는 죽음에 초연한 영웅들의 자살을 평소에도 늘 동경했다. 뮤트는 자신도 저런 영웅적인 죽음을 맞이한다면 얼마나 멋진가하고 철없는 어린아이의 망상가진 채 살아가는 낭만주의자였다. 그러나 정작 실제 죽음에 직면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그는 죽음 앞에서 벌벌 떠는 자신의 비겁한 모습을 발견하고 자학한다. 죽음에 대면하여 당당히 맞서기 보다는 마누라 생각이나 하며 애통해하는 자신의 모습에 절망한다.
그 사건 이후 뮤트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자학에 한동안 시달렸다. 그리고 이 곤혹스러움에 벗어나기 위해 뮤트는 한 가지 변명을 생각해 낸다.
너무 갑자기 당한 상황이었으므로 그런 옹졸한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어쩌면 죽음은 연습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당시의 뮤트는 이렇게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있었다.
1.죽음 연습
그 일이 있은 뒤 뮤트는 죽음에 대해 연구했다. 책을 찾아보며 죽음의 실체와 두려움의 원천을 파악해 보려 애썼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 세상의 삶에 대해서는 그 많은 연구들과 합리적인 결론들이 난무했음에도 정작 죽음에 대해서는 인간들은 거의 아는 바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죽음 어쩌구 하는 제목을 단 몇 권의 책들이 있었으나 결론은 하잘 것 없는 내용들 뿐 이었다. 죽음은 자연의 일부라서 전혀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식의 결론인데 그런 자들은 죽음을 체험하지 못한 자들이었다. 이론만 아는 자들이었으며 실전에 들어가면 형편없이 두려워할 자들 뿐 이었다.
뮤트는 죽음 이론서에서는 전혀 도움을 받지 못했다. 뮤트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역사적 인물로 돌아갔다. 다시 수많은 영웅적 죽음에 대한 기록을 보며 힘을 얻었다. 두려움의 원천은 알지 못하였지만 죽음에 대한 영웅들의 결연한 태도를 복습함으로서 뮤트는 두려움에 대한 적개심(?)을 키워갔다. 이제 죽음 앞에서 떨지 않으리라. 최소한 간호원의 손을 잡으면서 삶을 구걸하는 그런 구차한 모습정도는 피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죽음 연습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가에 대해서 뮤트는 이제 곧 검증할 기회를 얻게 된다.
2. 두번째 재현되는 죽음의 시츄에이션(Situation)
이제 뮤트의 그러한 연습과 의지가 죽음 앞에 어떻게 작동할지를 시험할 기회가 다시 재현되었다. 그 상황은 첫 번째 상황을 완전히 복제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발작의 원인도 같았고, 병원으로 후송된 모습도 같았고 병원도 같은 병원이었으며 병원에서 진행된 응급처치의 과정도 똑 같았다. 기묘한 상황이었다. 마치 드라마에서 배우의 실수로 NG가 났을 때, 연출자가 다시 “큐!!”를 외치는 듯이 그렇게 동일한 조건, 동일한 상황(Situation)이 전개된 것이다.
이제는 실수 없이 해야 한다. 다시 NG를 내서는 안 된다. 지인이 당황하며 구급차를 부를 때만 하더라도 뮤트의 연습은 효과를 발휘했다. 뮤트는 짐짓 비장하게 말한다.
“나는 괜찮아!”
그 말은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탄을 맞고 비서실장이 부축했을 때 했던 말이 “나는 괜찮아!”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늠름한 자세는 오래 가지 못했다. 두 번째 발작이 시작되자 뮤트는 곧 무너진다. 주연배우가 액스트라로 바뀌기 시작했다.
지진의 두려움을 아는가. 뮤트는 일본에 수년을 살아보아서 지진의 두려움을 잘 알고 있다. 땅이 흔들흔들 흔들리면 그네 타듯 재미도 있으리라고 생각될지 모른다. 실제 땅만 흔들리는 미세 지진인 경우는 흔들흔들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진도 4.0만 넘어가면 상황은 달라진다. 땅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흔들린다. 그때 사람들은 파랗게 질린다. 땅이 흔들릴 때는 평상심을 유지할 수가 있지만 벽이 흔들릴 때는 왈칵 두려움이 솟는다. 어디 의지할 데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데도 기댈 데가 없기 때문이다. 붙잡을 데가 없기 때문이다. 그 때, 아무리 담대한 자라도 새파랗게 질리게 된다.
발작은 심장을 죄여온다. 그때까진 얼굴을 찌푸리며 고통과 싸울 수 있다. 그런데 부정맥이 시작되면 그땐 고통이고 무어고 간에 오직 두려움만이 전신을 엄습한다. 곧 죽는다는 생각만 들면서 비명을 지르며 호소한다. 뮤트의 죽음 연습은 전혀 효과가 없었다. 뮤트는 구급차 내내 “좀 빨리 가주시오!”를 외쳤으며 도착해서 어디론가 실려 가는 병상위에서 간호원의 손을 전보다 더 꼭 잡고 있었다. 수축기 혈압이 200을 넘고 있었다. 혀 밑에 어떤 약제가 들어갔으며 꼭 물고 있으라고 했다. 의사가 “위산역류인가?”하고 자문했다. “무엇을 먹었죠?”하고 물었다. “위산 역류 좋아하네!” 가쁜 호흡 가운데서도 뮤트는 지체없이 소리쳤다. “신경안정제 먹으면서 술을 먹었단 말이요!” 의사의 표정이 심각해 졌다. 곧 커다란 닝겔 병이 뮤트의 팔에 꽂혀졌다. 병상은 이리 저리 옮겨졌으며 여러 가지 검사가 시행되었다. 부정맥이 조금씩 진정되고 있었다. 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졸음이 쏟아졌다.
3. 죽음에 대하여(2)-열린 터널의 출구-
졸음이 쏟아지고 뮤트의 뇌파는 알파, 베타, 감마파로서 의식의 심연까지 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꿈 한편이 뮤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1)꿈 이야기(17인의 프로페셔널)
뮤트는 어느 극장에 앉아 있었다. “17인의 프로페셔널”이 상영되고 있었다. 뮤트는 전쟁의 역사에 관심이 있었으므로 세상의 온갖 전쟁영화는 다 보았다. 보통 전쟁 영화는 모두 승전국이 주인공이 되어 패전국에 대해 통쾌한 승리를 거두는 것을 주제로 한다. 그러나 제임스 코반이 주연한 “17인의 프로페셔녈”은 드물게 승전국 미국이 아닌 패전국 독일이 주인공이 되어 펼치는 몇 편 안되는 희귀한 영화중의 하나이다.
장면은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접어들던 1943년. 소련전선이다. 전쟁의 치열함을 사실적으로 나타나는 데도 이 영화는 수작중의 수작이다. 난무하는 총탄 속에 슈타이너 상사(제임스 코반)가 이끄는 소대에 권위적인 스트랜스키 장교가 부임해 온다. 뮤트는 이 영화를 몇 번이나 보았으므로 스토리를 잘 알고 있다. 부임해온 스트란스키 대위는 프러시아 명문가 출신으로 오직 가문의 명예를 위해 철십자훈장(Cross Of Iron)을 꼭 가슴에 달아야 한다는 명예욕으로 가득 차 있다. 스트란스키 대위는 승전 욕에만 사로잡힌 나쁜 놈이다. 상부로부터 후퇴 명령을 받았음에도 스타이너에게 알리지 않고 태연히 배신한다. 17명의 스타이너 분대는 고생 끝에 겨우 진지로 귀환한다. 그러나 스타이너 소대인줄 알면서도 트레빅 중위는 무조건 사격을 명령, 스타이너 소대를 몰살시키려 한다. 부하들의 처참한 죽음을 보고, 드디어 분노한 스타이너는 트레빅을 죽이고 스트란스키를 찾아가 총을 겨눈다. 서로 죽이지 말고 같이 싸우자는 스트란스키의 말에 스타이너는 한 자루의 총을 던져주고 같이 전화 속으로 뛰어든다. 그 뒤를 따르는 스트란스키, 하지만 그는 총알을 장전하는 법도 제대로 모르고 있다. 그리고 작열하는 포탄과 난무하는 총탄 속에서 무서워 덜덜 떨고 있다.
육군 대위라는 자가 총기 장전법도 모른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이런 웃지 못 할 부조리한 희비극을 두고 스타이너는 미친 듯이 웃어댄다. 이게 철십자 훈장을 타는 자의 모습인가! 저 겁쟁이가 독일군 장교란 말인가! 스타이너는 미친 듯이 웃는다. 사방에 총탄이 난무하고 포탄이 작렬하는 가운데서도 그는 정신없이 웃어젖힌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극장에 온통 스타이너의 웃음소리로 가득하다. 뮤트도 같이 웃는다. 가소로운 스타이너..하하하하하하... 웃음소리는 끝이지 않는다. 그런데..스타이너는 화면 속에서 계속 웃는데.....그의 시선이 더 이상 스트란스키를 보고 있지 않다. 그는 관객인 나를 쳐다보고 웃고 있다. 하하하하하하....하고 웃고 있다. 뮤트는 갑자기 자기 옷을 본다. 아!! 이게 무슨 일인가..뮤트가 스트란스키의 장교복을 그대로 입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어..내가 스트란스키가 되다니..하는 순간..화면에서 쓰러져 있던 독일 군 시체들이 슬금슬금 일어나며 뮤트를 향해 같이 웃기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영화관 속의 관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 뮤트를 향해 웃기 시작한다. 하하하하하하하하.....뮤트는 자리에 일어나 출입구 쪽으로 필사적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니 스타이너가 뮤트를 향해 총을 겨눈다. 그는 뮤트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뮤트는 필사적으로 뛰었다. 웃음소리가 뮤트를 계속 추격하고 있었다. 빨리 도망가야 하는데 다리가 잘 움직이질 않는다.. 스로우 비디오처럼 그렇게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마음은 급하고 발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 때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탕!!!!! 으악! 뮤트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
번쩍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딘가..뮤트는 병상에 누워있었다. 시야의 희뿌연 안개가 걷히자 아내가 뮤트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꿈이었구나..뮤트는 다시 눈을 감았다.
2) 등 뒤에 창이 꽂히는 죽음, 그 영광과 오욕
“가장 영광스러운 죽음은 등 뒤에 창이 꽂히는 것이다” 이 말은 로마의 검노(劍奴) 스파르타구스의 죽음을 묘사한 말이다. 예전의 뮤트는 이러한 죽음을 동경했다. 가장 영광스러운 죽음은 음모에 휘말려 죽는 것이며, 예기치 않는 배후의 기습에 의해 죽는 것이다. 그것은 그 누구도 정면에서는 그를 대적할 용기가 없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그를 대하는 것은 죽음을 정면에서 대하는 것이며 맞설 수 없는 상대였기 때문에 등 뒤에서 창을 꽂는 것이다.
뮤트는 이러한 자신의 신념이 얼마나 자기와는 맞지 않으며 상관이 없는 것인가를 이제 절절히 느끼고 있다. 뮤트는 저런 죽음을 맞이할 만큼 강하지도 위대하지도 않음을 절절히 깨닫고 있었다. 그는 졸장부였다. 뮤트는 이리 저리 뒤척이며 괴로워했다. 그는 생각하다가 결국 자신의 운명도 등 뒤에 창이 꽂히는 죽음으로 막을 내릴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선언했다. “가장 비겁한 죽음도 등 뒤에 창이 꽂히는 것이다”라고 외쳤다.. 스파르타쿠스는 적을 정면으로 향하다가 등에 창이 꽂힌다. 그러나 뮤트는 적을 피해 달아다며 등을 보이다가 등에 창이 꽂히는 것이다. 등에 창이 꽂혀 죽은 자, 그가 용감했는지 비겁했는지, 오직 그 자신만이 알 일이다.
3)죽음-그 열린 터널의 출구-
이제 결론은 났다. 죽음 연습, 이제는 더 이상 기회는 없다. 뮤트는 그냥 겁쟁이로 살다가 죽기로 작정한다. 재수해도 불합격하면 삼수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나는 겁쟁이며 평생 죽기를 무서워하며 한평생 죽음 앞에 벌벌 떨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인정하기는 괴롭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죽음이란 무엇이 길래 이리도 사람을 두렵게 하는가. 뮤트는 병상에 누워 문득 문득 죽음..죽음이란 무엇인가하며 다시 고민하곤 했다. 죽음이란 무엇일까..뮤트가 다시 죽음의 문제에 집착하다가 어느 순간 아!!하며 몸을 벌떡 일으킨다. 그리고 성경책을 뒤지기 시작했다.
히브리서 2장 15절: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하심이니..
“나는 겁쟁이며 평생 죽기를 무서워하며 한평생 죽음 앞에 벌벌 떨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란 말과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 란 말은 완전히 일치하는 말이 아닌가. 이건 같은 말이다. 뮤트의 말과 성경의 말이 묘하게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것은 뮤트는 자기 같은 비겁한 자만이 이렇게 죽음 앞에 벌벌 떤다고 생각한데 반하여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았다. “종노릇하는 모든 자”라고 말 하고 있었다. 뮤트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모두 죽음 앞에 벌벌 떤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놓아 준다”고 말 하고 있다. 어디로 어떻게 놓아준다는 말인가. 죽음에서 다시 삶으로 되돌린다는 말인가. 한번 죽으면 다시 삶으로 돌아 올 수 없다. 그렇다면...
뮤트는 무릎을 쳤다. 아!! 죽음은 동굴처럼 막혀 있지 않다. 죽음은 터널처럼 뚫려 있는 것이다. 35편에 “죽음, 막힌 동굴의 입구”란 제목은 틀린 말이었다. 죽음은 입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출구가 있다. 죽음은 열린 터널의 출구”인 것이다! 죽음은 동굴이 아니다. 죽음은 입구만 있는 것이 아니다. 터널 저 쪽에 출구가 있는 것이다. 죽음이 막혀있는 동굴이라면 두려움은 없다. 그러나..만일 동굴 저 편에 뚫린 출구가 존재한다면..그건 두려운 일이다. 출구 저쪽에 무엇이 있는가.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가. 출구 저 쪽의 불가지의 세계가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이다. 죽음은 우리를 두렵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죽음으로 끝나지 않음이 두려운 것이다. 우리 인생은 죽음으로 청산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를 두렵게 한다. 우리 인생은 죽음 저편으로 연장된다. 그리고 놓아주는 손을 기다려야한다. 출구를 통해 나아가 죽음에서 놓일 때 그 때, 죽음에서 청산되는 것이다. 그때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뮤트 뿐만 아니라, 석가도 공자도, 알렉산더도 징기스칸도 모두 죽음 앞에는 사시나무 떨 듯 떨 수밖에 없는 것이다. 뮤트만이 겁쟁이가 아니었다!!
'옛사랑이 머무는 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머나먼 연가(67)-네 통의 편지- (0) | 2013.09.25 |
---|---|
머나먼 연가(66)-길은 항시 어데나 있고, 길은 결국 아무데도 없다- (0) | 2013.09.16 |
머나먼 연가(64)-제멋대로 굴러가는 사랑- (0) | 2013.08.29 |
머나먼 연가(63)-피워오르는 연기- (0) | 2013.08.24 |
머나먼 연가(62)-평론(23)-Erosology의 종말(4)- (0) | 2013.08.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