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랑이 머무는 뜰

머나먼 연가(67)-네 통의 편지-

뜰에봄 2013. 9. 25. 19:31

 

 길은 항시 어데나 있고, 길은 결국 아무데도 없다.

 신은 항시 어데나 있고, 신은 결국 아무데도 없다.

 사랑은 항시 어데나 있고, 사랑은 결국 아무데도 없다.

 연인은 항시 어데나 있고, 연인은 결국 아무데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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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트는 나흘에 걸쳐 연속적으로 메일을 날린다.

첫날은 길은 항시 어데나 있고, 길은 결국 아무데도 없다.

둘째 날은 신은 항시 어데나 있고, 신은 결국 아무데도 없다.

셋째 날은 사랑은 항시 어데나 있고, 사랑은 결국 아무데도 없다.

넷째 날은 연인은 항시 어데나 있고, 연인은 결국 아무데도 없다.

 

뮤트는 M선배의 권고로 마지못해 그녀에게 편지를 쓰고는 있지만 그의 마음은 그녀가 K에게 보내었던 그 추파에 대한 질투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환타쥐에게 자기가 K에게 보인 그녀의 행동에서 시기심과 질투를 느꼈다고 고백했지만 그것으로 그런 감정이 해소되지는 않았다. 뮤트는 유아적 질투, 시기심이 유난히 강한 사람이었다. 뮤트가 쓴 글들은 매우 현학적이며 사물에 대한 깊은 혜안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글속에는 여전히 질투시기심이 흉흉히 살아있었다.

첫째 날의 길이 아무데도 없다는 메일은 길이 갖는 상징성을 늘어놓으며 결국 뮤트와 환타쥐가 만날 명분이 없으므로 결국 길이 없는 것과 같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미국에 못가겠다고 버티며 그녀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두 번째 날의 편지, “신은 항시 어데나 있고, 신은 결국 아무데도 없다는 글은 신은 있으나 인간이 생각하는 그런 신은 아니다 라는 내용이었다. 기독교의 신은 오늘날의 교회가 축복과 은혜로 믿는 그런 신이 아니며 특히 한국의 기독교가 믿는 그런 기복적 신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윤리에서 초월하여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 그런 신은 없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은 행위로 부터는 자유롭지만, 윤리로 부터는 자유롭지 못하다고 뮤트는 쓰고 있었다. 하나님은 구제의 신이 아니라 윤리적인 신이라는 주장이었다.  따라서 빗나간 화살의 진로에는 과녁이 없듯이, 그런 신앙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면 그것은 신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겠냐는 말이었다.  따라서 이 세상 기독교인들이 마치 신이 늘 항상 자기 옆에 있는 것처럼 신앙하고 있지만 실은 신은 그들에게는 없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그녀에게 보내는 메일에서 생뚱맞게 왜 신의 속성과 존재에 대해 거론하는가. 그것은 K에게 친절하고 관대하게 대한 그녀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기 위해 이 어마어마한 신의 존재론적 설명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적반하장 격으로 그녀의 기독교도로서의 품행을 은근히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 날의 편지, “사랑은 항시 아무데고 있으나, 사랑은 결국 아무데도 없다는 편지는 그 내용이 방대하고 길었으며 마치 한편의 평론 형식을 띠고 있었다. 그 편지는 인간의 성과 쾌락, 그리고 사랑과의 관계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인간은 사랑의 대상을 찾기도 어렵고 찾는다고 해도 사랑을 유지하기도 어렵고, 유지한다고 해도 가장 이상적이고도 바람직한 사랑에 이르기는 더욱 어렵다는 점을 논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늘 사랑이 인간의 의식에 존재하고 늘 사랑속에 사는 것 같지만 사실, 그들은 사랑을 만나고 유지하고 완성하는 데는 늘 실패하고 있으므로 결국 인간에게 사랑은 아무데도 없는 것과 같다는 내용이었다. 그 문제는 사랑은 애정이라는 정서의 문제뿐만 아니라 섹스라는 성적인 관계를 동반하는 데서 발생한다고 쓰고 있었다.

 

뮤트는 사랑과 섹스의 불일치를 혼자 이리 저리 생각하며 네 가지로 정리해 내었다. 사랑과 섹스는 대상, 환경, 정서, 만족이라는 면에서 여러 가지 불일치를 초래한다. 대상의 불일치는 사랑하는 사람과 섹스의 대상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데서 오는 불일치이다. 환경의 불일치는 섹스를 할 수 있는 시간이나 장소가 늘 제약되는 데서 오는 불일치이다. 심리적 불일치는 섹스에 대한 나쁜 추억이나 콤플렉스 등으로 발생하는 정서적인 불일치이다. 그리고 마지막 만족의 불일치는 섹스를 하더라도 상대의 성적 환상을 모두 채울 만큼 만족한 섹스를 하는데 늘 실패하는데서 오는 불일치이다.

 

뮤트는 그녀에게 이렇게 사랑도 어렵고 섹스도 어려우므로 창조주가 만들어 주신 유일한 돌구는 자위행위밖에 없다는 이상한(?)결론을 그녀에게 제시했다. 그는 미국에 가서 그녀와 섹스하면서 느껴야할지 지 모르는 불만족을 감내하면서까지 도미를 감행하기 보다는 그냥 집에서 그녀와의 상상속의 섹스를 즐기는 자위행위가 모험을 피하는 안전한 길이라는 더욱 이상한(?) 대안을 제시했다. 발기를 유지한 채로 알 수도 없는 그녀의 성감대를 찾기 위해 전희(前戱)의 수고를 감내하는 것도 정말 고통스러운 일 일 것이라는 농염한 문장을 곁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에 가서 까지 우리가 이러한 불일치를 확인할 필요가 있겠느냐면서 메일을 끝맺고 있었다.  이 편지 내용도 그녀의 속을 상하게 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네 번째의 편지는 이 연가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애인은 사랑을 주는 대상체이지만 애인은 영속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면 애인과 사랑은 스위치와 형광등처럼 늘 시간적으로 동시성을 지니는가. 아니다. 애인은 최소한 사랑보다는 생명이 길다. 부부는 사랑이 식어도 애인의 관계를 제도적으로 인정하는 관계가 된다. 사랑은 그렇지가 않다. 사랑은 태어나서 얼마 못가서 죽는 존재이며 허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존재이다. 사랑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존재인가. 그것은 죽네 사네하며 사랑하는 사이라도 십년만 떼어 놓으면 어느 새 식고 마는 데서 금방 알 수 있다. 여자의 사랑은 더욱 그렇다. 여자는 사랑 때문에 대상을 찾지 않고 대상을 찾기 위해 사랑을 한다. 그래서 대상이 바뀌면 사랑도 바뀐다. 남자보다 훨씬 쉽고 유연하게 사랑을 옮기며 변화시킨다. 남자보다 사랑을 쉽게 잊는다. 그러므로 여자는 사랑의 대상체가 견고할 것을 먼저 추구한다. 그 대상체의 아이를 낳아야 될 운명이므로 사랑의 대상체를 고르는 일이 사랑보다 더 중요하다. 여자가 검사, 판사나 부자, 권력자와 결혼하고 자하는 것은 그것 때문이다. 아이를 기르는 환경이 안전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보다 훨씬 현실적인 사랑을 원한다. 강한 남자와 사랑하며 결혼하기를 원한다. 대상체가 결정되면 여자의 사랑은 얼마든지 자가 발전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어찌한가. 모든 사람은 여자에게는 연인의 대상이 되며 연인은 온 세상에 늘 가득하다. 그것은 남자도 마찬 가지이다. 그러나 사랑을 완성시키는 결혼에 이르러서는 사랑의 대상이 반드시 연인에 한정하지 않는다. 결혼은 부부가 백년의 연인을 약속하는 의식이지만 그 결혼은 반드시 사랑을 전제하지 않는다. 강한 자가 연인이 된다. 사랑하는 자가 연인이라는 고전적 정의를 따른다면 결혼이라는 제도를 분기점으로 사랑을 기초한 고전적 연인은 소멸하는 셈이다. 그래서 연인은 항시 어데나 있고, 연인은 결국 아무데도 없다“ 는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

 

뮤트는 그 편지에서 대충 거기까지 쓰고 있었다. 그리고 분쟁의 소지가 있는 다음 단락을 쓰기 위해 조심스럽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녀가 뮤트에게 쓴 메일의 내용처럼 뮤트는 그녀가 현숙하며, 또한  모든일에 뮤트의 마음에 들더라도 그녀와 결혼하거나 같이 살 수는 없는 존재라고 썼다.  그러나 K는 다르다고 했다. 그는 그녀와 결혼이 가능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K는 뮤트보다 강한 남자라는 것, 그는 조건면에서 뮤트보다 우월하고, 사랑의 영속성면에서 K는 뮤트보다 훨씬 보장된 존재라는 것,  신체적, 정력적인 면에서 뛰어날 뿐 아니라, 사랑의 열정에서도 뮤트보다 뜨거운 남자라는 것,  그는 여자가 결혼하기에는 모든 합당한 조건을 구비하고 있으며 여자가 의지할 만한 강한 남자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주저리 주저리 나열했다. 그녀가 K에게 상냥하게 대한 것은 당연한 일로써 뮤트가 시기와 질투를 느낀 것은 인간적이지만 사실 비합리적인 감정이었을 뿐이라고 썼다. 그리고 그녀가 K와 결합하여 좋은 가정을 꾸렸으면 좋겠다늘 말과 함께사랑의 대상체로서 K가 결정되면 여자의 속성상 얼마든지 K에 대한 사랑을 자가 발전 시킬 수 있을 거라고 염장을 지르면서  뮤트는 조용히 키보드에서 손을 내리고 있었다.

 

뮤트는 이 네 번째 편지가 그녀에게 어떤 반향을 일으킬까 일순 두려웠다. 보낼까 말까...필시 그녀는 광분하리라..

그러나 뮤트의 가운데 손가락은 슬며서 이메일의 보내기 버턴을  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곧 메일이 성공적으로 발송되었다는 메시지가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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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하는 일이 늘 뮤트님을 실망시키니

모두 제 책임입니다.

이건 비아냥이 아니고요.

정말 모두 제 책임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여자는 창녀의 속성이 있다는 말은

저를 두고 하신 말씀이겠지요?

뮤트님 만나기 전까지는....  

저 나름대로 현숙하게 살았다고 자부합니다.

그래도 저랑 안 맞는다니 어쩌겠어요.

 

그런데요 저랑 맞으면 또 어쩌려구요.

저랑 안 맞으니 헤어지겠다는 말씀.

그럼 저랑 맞으면.....................

저랑 같이 사실래요?

 

제가 뮤트님 기분 다 맞추고

제가 현숙하고

그래서 뮤트님과 저랑 맞으면

저랑 같이 사시겠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