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기울여도 있는 것은 역시 바다와 나뿐.
밀려왔다 밀려가는 무수한 물결 우에
무수한 밤이 왕래하나,
길은 항시 어데나 있고,
길은 결국 아무 데도 없다.
아! 반딧물만한 등불 하나도 없이
울음에 젖은 얼굴을 온전한 어둠 속에 숨기어 가지고… 너는,
무언의 해심에 홀로 타오르는
한낱 꽃 같은 심장으로 침몰하라.
-서정주, <바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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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트는 병원에 누워 하루를 자다가 깨다가 반복하는 일상을 보내게 된다. 이 세상에 제일 편안한 곳은 꿈을 꾸지 않는 잠, 즉 백지화된 의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에서만 존재하는 편안함이다.
뮤트는 순간순간 잠에서 깨어나며 백지화된 의식에서 벗어날 때의 불편을 느낀 곤 했다. 그런데 가끔씩 잠에서 깨더라도 아주 편안할 때가 있다. 그 느낌은 편안하다기 보다는 어떤 아득함 같은 것이었다. 아주 깊은 곳에 숨겨진 요람 속에 누워있는 듯 한 편안함, 왜 우리는 가끔씩 그런 편안함을 느끼는 것일까. 그 편안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뮤트는 그 신비스러운 편안함이 어디서 오는가를 궁금해 했으나 그 답은 쉽게 찾아졌다. 아! 그 곳은 어머니 자궁 속 이었다. 그 편안함은 어머니 자궁 속에 깃들었던 그 때의 추억에서 오고 있었다. 생명이 시작되던 곳..우리는 거기서 나오고부터 이제 편안함은 없다. 뮤트가 일찌기 경험하지 못했던 이 절대적 편안함, 그 이질적인 체험은 그 뒤에는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 뮤트는 지금도 간혹 그때의 편안함을 그리워한다. 그때의 편안함을 다시 한번 누려보았으면 한다..
뮤트가 잠에서 깨면 아내가 있었고 또 잠에서 깨면 다른 문병객들이 뮤트를 쳐다보곤 했다. 그리고 혼자 남을 땐 다시 잠을 자고자 애쓰고 있었다.
그러기를 몇일, 어느 날 또 잠을 깨었을 때, 낯익은 얼굴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곳에는 놀랍게도 M선배와 K가 뮤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K는 며칠 뮤트가 안보이자 냉큼 뮤트 집에 전화해서 뮤트가 병원에 있음을 알아내었다. 그리고 M선배에게 이야기하였고 선배님은 천리 길을 마다않고 뮤트의 문병을 위해 부산으로 내려온 것이었다. M선배가 “약 먹고 뒈질라구 아주 용을 썼더만..한심한 사람 같으니라구”하고 핀잔을 주었지만 뮤트를 위로하는 따뜻한 마음이 전해졌다. K도 덩달아 “행님요. 진짜 약 먹고 죽는 사람은 확 묵고 캑 죽지..행님처럼 안 죽을 만큼 묵고 사람 놀래키고 안 그람미더! 백찌로 쇼 하지 말고 정신 쫌 채리소!!”하고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병원은 외출을 하려면 일정 수속을 밟아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으나 K는 싫다는 뮤트를 억지로 일으켜 환자복 입은 차림 그대로 차에 태워 병원 탈출을 불법으로 시도한다. “ K! 이 친구, 법학도이면서 법 어기는 게 예사라니까!”하며 뮤트는 건성 투덜거렸지만 답답한 병원에서 벗어나는 기대감도 있었다. 세 사람은 K의 외제 승용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즐겼으며 간만에 부산에 내려온 M선배를 대접하기 위해 회집에 까지 진출했다. 뮤트는 환자복을 입고 회집에 앉아 있었으므로 오가는 손님들이 이상하다는 듯이 힐끗 힐끗 뮤트를 쳐다보았다. K는 그 와중에도 뮤트를 강권하여 소주를 반병이나 마시게 하는 악동 짓을 서슴지 않았다. “술이나 약이나 천천히 끊어야지 갑자기 확 끊으면 금단증상으로 또 골로 가는기라..”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여러 재미있는 이야기로 웃고 떠들고 하다가 K가 화장실로 가는 틈을 타서 M선배님은 낮은 목소리로 뮤트에게 말했다.
“이 사람아. 환타쥐에게 연락 좀 하게나. 사람이 어찌 그리 무심한가. 어린애도 아니고 환타쥐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렇게 애를 먹이나. 제발 연락 좀 해보게. 자네가 병원에 있다고 했더니 환타쥐가 거의 패닉 상태에 빠진 것, 옆에서 보기에도 안타까울 정도라네. 이번 부산 내려오면서 자네가 꼭 환타쥐에게 연락하겠다는 약속을 받으마고 환타쥐에게 내가 장담했으니, 내 얼굴을 봐서라도 연락하시게. 아시겠는가. ”
M선배의 말이 하도 간곡하고 초급한 부탁이라 뮤트는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러마고 약속을 하기에 이르렀다. 병원에 돌아오면서 뮤트랑 둘이 있을 때면 재삼, 재사 다짐을 받고자 하였고 뮤트는 약속한 이상 꼭 연락하겠다고 선배님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선배님은 다시 서울로 떠났다.
당시는 지금처럼 무선 랜을 장착한 노트북이 일반화되지 않았던 때였다. 뮤트는 독방 입원실을 이용하여 자비를 들여 데스크 탑 컴퓨터를 유선으로 장착하는 부산을 떤 끝에 인터넷 접속환경을 만들었고 드디어 인터넷에 접속했다. 뮤트는 그녀에게 밤을 새우며 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지금 병원에 있지만 그리 걱정할 상황은 아니라고 일단 서두를 열었다. 그리고 이렇게 된 경위에 대해 K와 있었던 일을 언급하며 설명했다. 지금의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은 K에 대한 뮤트의 질투와 그녀가 K에 대해 관용하는 태도를 보인 데 대한 분노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실토했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에 가서 그녀를 만나고자 하는 스케줄은 다시 복원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우리에게 미래가 없음을 "길"의 비유릃 들어 그녀에게 완굑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길은 무엇일까요.
저는 어떤 길을 따라 환타쥐님을 만나러 가야할까요.
두 지점 간의 어떤 약속, 이것이 길입니다. .
그러나 우리가 어떤 약속을 할 수 있겠습니까.
두 지점이 서로 합의한 어떤 예정, 이것이 길입니다. .
그러나 우리에게 합의된 예정이 있겠습니까.
두 지점이 서로 만나기로 한 어떤 시간, 이것이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만나서 우리만의 시간을 영원히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길을 따라서는 만날 수 없습니다.
길이 없다는 말입니다.
길이 우리에게 허락한 것은 오직 그리움뿐입니다.
두 지점이 서로 앓고 있는 어떤 그리움, 이것도 길이기 때문입니다.
네..이것은 할 수 있습니다.
길은 항시 어디에나 있습니다만..
길은 결국 아무데도 없습니다.
뮤트는
제목을 “길은 항시 어데나 있다. 그러나 길은 결국 아무데도 없다.”
이렇게 쓰고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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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계신다니 너무 놀랐습니다.
그 동안 아무 소식이 없기로
별별 생각을 다 했건만
겨우 병원에 계신다니
기가 막힙니다.
얼마나 병원에 입원해 계실지 모르겠지만
아무쪼록 질리도록(?) 쉬어보시고.....
책을 보는 건 오히려 안 좋을 거 같네요.
뮤트님이 아픔과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 순간...
손톱만큼도 그것을 덜어드릴 수 없지만...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에게 간절히 기도함으로
뮤트님은 반드시 회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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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트님
저는 뮤트님 만나 많이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뮤트님은 행복해 지시지가 않네요.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행복해지시지가 않나보네요.
저는 뮤트님 행복하게 해드릴 자신 있었는데....
정말 자신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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